- 14 Dec, 2025
사수가 '잘했어'라고 한 말 한 달 버팀
사수가 '잘했어'라고 한 말 한 달 버팀 그날의 슬랙 메시지 오후 4시 32분. 슬랙 알림이 떴다. "신기획님, 이번 화면 정의서 잘했어요. 플로우 깔끔하네요." 사수였다. 세 번 읽었다. 네 번째는 소리 내서 읽었다. 다섯 번째는 스크린샷 찍었다. '잘했어요.' 입사 후 8개월. 처음 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건 좀...' '이 부분 다시' '왜 이렇게 했어요?' 빼고는 처음이었다. 손이 떨렸다. 마우스 커서가 화면을 헤맸다. 옆자리 디자이너가 물었다. "왜 웃어요?" "아뇨." 웃고 있었다. 몰랐다.8개월의 무게 입사 첫날. 노션 계정 만들었다. 기획서 양식 받았다. 사수가 말했다. "일단 이것부터 따라 해봐요." 따라 했다. 2주 걸렸다. "이건 왜 이렇게 했어요?" "..." "다시 해봐요." 다시 했다. 1주 더. "음... 이 부분은..." 또 고쳤다. 3개월차. 회의록 담당이 됐다. 회의 내용 받아적기. 정리. 공유. "회의록은 잘하네요." 이게 칭찬인가 싶었다. 5개월차. 화면 정의서 처음 맡았다. 사수 기획서 열어서 구조 복사. 내용만 바꿨다. "이건 그냥 제 거 따라 한 거예요?" "...네." "본인 생각을 넣어야죠." 본인 생각이 뭔데. 나도 모르겠는데. 7개월차. 개발자 미팅에서 얼어붙었다. "이 플로우 말이 안 되는데요?" "아... 그게..." 사수가 대신 설명했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날 저녁. 화장실 거울 보면서 생각했다. '나 기획자 맞나.'그 화면 정의서 그 화면 정의서는 특별할 게 없었다. 회원가입 플로우. 누가 봐도 뻔한 거.이메일 입력 인증번호 발송 인증 확인 비밀번호 설정 완료다만 이번엔 좀 달랐다. 사수 기획서 안 봤다. 경쟁사 3개 가입해봤다. 어디서 막히는지 체크했다. 토스: 인증번호 자동 입력. 편하다. 당근: 재전송 버튼 위치 애매. 못 찾았다. 뱅크샐러드: 비밀번호 규칙 설명 친절. 좋다. 메모했다. 우리 서비스는 어떻게 할까. 40대 이상도 쓴다. 자동 입력 힘들면? 재전송 버튼은 크게. 비밀번호 규칙은 입력창 바로 아래. 플로우 그렸다. 예외 케이스 7개 추가. 에러 메시지도 썼다. "인증번호를 다시 확인해주세요." 아니다. 너무 딱딱하다. "앗, 인증번호가 일치하지 않아요. 다시 입력해주세요!" 이것도 오글거린다. "인증번호를 확인해주세요 :)" 이모티콘은 좀... 결국 첫 번째로 돌아갔다. 명확한 게 낫다. 3일 걸렸다. 사수한테 보냈다. 답장이 없었다. 6시간 후에 왔다. "잘했어요." 그 말. 한 달의 연료 그 말로 한 달을 버텼다. 진짜다. 다음 주. 개발자가 물었다. "이 버튼 위치, 왜 여기예요?" 전엔 얼어붙었다. 이번엔 달랐다. "사용자 테스트 3건 봤는데요, 오른쪽 하단보다 중앙 하단이 인식률이 높았어요." 거짓말이다. 테스트 안 했다. 경쟁사 분석한 거다. 그래도 개발자가 고개 끄덕였다. "아 그렇구나. 알겠습니다." 이겼다. 작은 승리. 2주 차. 회의에서 의견 냈다. "이 기능, 우선순위 낮춰도 될 것 같은데요. 사용자 니즈가..." 말이 나왔다. 떨렸지만 끝까지 했다. 팀장이 물었다. "근거는?" "GA 데이터 보니까 이 페이지 체류 시간이 평균 8초예요. 읽지도 않고 넘어가요." 준비했다. 어젯밤에 GA 2시간 봤다. 팀장이 웃었다. "오케이. 다음 스프린트로 미뤄요." 내 의견이 반영됐다. 처음이었다. 3주 차. 후배가 들어왔다. 나보다 어렸다. "선배님, 화면 정의서 어떻게 써요?" 선배님. 나를 선배님이라고 불렀다. "일단 경쟁사부터 써봐. 3개 이상." 사수가 내게 안 알려준 방법을 알려줬다. 내가 혼자 깨달은 것. "네!" 후배가 고개 숙였다. 이상했다. 좋았다. 4주 차. 사수가 또 물었다. "신기획님, 이번 기획서 일정 어때요?" "3일이면 될 것 같아요." "이유는?" "이번 건 신규 플로우가 아니라 개선이잖아요. 기존 문서 베이스로 수정하면 빠를 것 같아요." 사수가 웃었다. "맞네요. 그럼 부탁해요." 부탁. 지시가 아니라 부탁이었다.왜 이렇게까지 왜 한 마디에 이렇게까지 흔들렸을까. 생각해봤다. 8개월 동안 나는 내가 뭘 하는지 몰랐다. 회의록 쓰고, 화면 그리고, 피드백 받고, 고치고. 이게 맞나. 틀렸나. 몰랐다. 기준이 없었다. 정답이 없었다. 사수 말이 정답이었다. "이건 아니에요." → 아니구나. "다시 해봐요." → 틀렸구나. 틀린 것만 배웠다. 맞는 건 몰랐다. 그러다 처음 들었다. "잘했어요." 아. 이게 맞는 거구나. 그 순간 좌표가 생겼다. 북극성 같은 거. '이 방향이 맞아.' 그래서 그렇게 기뻤던 거다. 방향을 알았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 인정받고 싶었다. 기획자로서가 아니라. 일하는 사람으로서. '이 사람 괜찮네.' '좀 하네.' '제대로 배우고 있어.' 그런 거. 비전공 출신이다. CS 모른다. SQL 못 한다. 디자인 못 한다. 개발 모른다. 그냥 열심히 할 줄만 안다. 그래서 열심히 했다. 경쟁사 분석하고, GA 보고, 사수 기획서 읽고, 유튜브 강의 들었다. 인정받고 싶었다. '신기획, 쟤 괜찮아.' 그 한 마디가 그걸 줬다. 그래서 한 달을 버텼다. 지금 오늘도 출근했다. 사수가 슬랙 보냈다. "신기획님, 이번 기획서 좀 아쉬운데요. 케이스 하나 빠뜨렸어요." 웃었다. "아 진짜네요. 오후에 수정할게요." 안 무너졌다. 한 달 전 같았으면 하루 종일 우울했을 거다. 이젠 안다. 틀려도 괜찮다. 고치면 된다. 한 번 잘하면, 또 잘할 수 있다. 그 '잘했어요' 한 마디가 증명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걸. 그래서 오늘도 기획서 연다. 또 틀릴 거다. 또 고칠 거다. 언젠가 또 들을 거다. "잘했어요." 그때까지.작은 칭찬 하나. 생각보다 오래 간다.
- 13 Dec, 2025
신림동 월세 50만 원과 3600만원 연봉의 현실
급여명세서를 열어보는 25일 월급날이다. 3,600만 원을 12로 나누면 300만 원. 4대 보험 떼고 나면 손에 쥐는 건 250만 원 정도. 월세 50만 원 나가고, 관리비 10만 원, 통신비에 교통비까지 합치면 80만 원은 그냥 증발한다. 남는 건 170만 원. 점심은 회사 근처 8,000원짜리 김치찌개. 저녁은 편의점 도시락 5,000원. 한 달이면 식비만 30만 원. 데이트 비용 월 20만 원은 기본. 친구들 결혼식 축의금 시즌 오면 완전 망한다. 부모님 용돈은 꿈도 못 꾼다. 통장 잔고는 항상 100만 원대. 비상금이라고 하기엔 너무 적고, 저축이라고 하기엔 창피한 금액. 이게 2년 차 기획자의 현실이다.신림동 6평 원룸의 방정식 부동산 앱을 열면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50만 원. 이게 신림동 시세다. 역세권은 60만 원. 강남까지 30분이면 간다는데, 출퇴근 지하철에서 1시간은 선다. 원룸 구조는 다 똑같다. 문 열면 신발장, 화장실, 그리고 침대 놓으면 끝나는 공간. 책상은 침대 옆에 붙여야 하고, 옷장은 빌트인이라 불리는 벽장 하나. 요리는 포기. 인덕션 하나에 싱크대가 전부다. 집주인한테 "에어컨 좀 새 걸로 바꿔주세요" 했다가 "싫으면 나가세요" 들었다. 계약서에 '현 상태 그대로'라는 한 줄. 벽에 못 하나 박으려면 눈치 본다. 이게 월세 사는 사람의 처지다. 주말에 집에 있으면 답답해서 카페 간다. 아메리카노 4,500원. 한 달이면 18만 원. 결국 월세 말고도 '살기 위한 돈'이 계속 나간다. 6평에서 인생을 산다는 게 이렇다.사수한테 "괜찮아요?" 듣는 순간 아침 10시 출근. 사수가 "어제 기획서 봤는데, 이 부분 다시 해봐" 한다. 밤 11시까지 고쳤는데 또 수정이다. "네, 알겠습니다" 하고 자리로 돌아온다. 화면 정의서 5페이지를 3시간 동안 쓴다. 이 버튼이 여기 있어야 하나, 저기 있어야 하나. 사용자 시나리오는 맞나. 예외 케이스는 다 생각했나. 머리가 터질 것 같다. 개발자가 슬랙으로 "신기획님, 이 로직 어떻게 되는 거예요?" 물어본다. 순간 멈춘다. 로직? 생각 안 해봤다. "제가 확인하고 답변드릴게요" 타이핑하는 손이 떨린다. 점심시간에 사수가 "요즘 힘들어 보이는데 괜찮아?" 물어본다. "네, 괜찮습니다" 자동으로 나온다. 괜찮지 않다. 전혀 괜찮지 않다. 하지만 "힘들어요" 하는 순간 무능해 보일 것 같아서 입을 다문다. 7시 반 퇴근. 집 가는 지하철에서 노션 앱을 연다. 오늘 못 끝낸 업무 3개. 내일 회의 준비 1개. 모레까지 제출할 기획서 1개. 눈을 감는다. 내일도 똑같을 것이다."1년 뒤 나는 뭐가 달라질까" 동기는 대기업 간다고 했다. 초봉 4,500만 원. 복지 좋고, 교육 프로그램 있고, 커리어패스 명확하다고. 나는? 스타트업 2년 차에 3,600만 원. 복지는 스낵바 과자 무제한. 토요일 오후. 노트북 켜서 토이 프로젝트 기획서를 쓴다. 포트폴리오 만들어야 한다는 강박. "기획자는 실력으로 말한다"는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근데 실력이 뭔지 모르겠다. PRD 작성법 유튜브 영상을 본다. "유저 스토리부터 시작하세요" "데이터 기반으로 의사결정하세요" "개발자와 원활히 소통하세요". 다 안다. 근데 실전에서는 안 된다. 왜? 일요일 저녁. 여자친구가 "우리 언제 결혼해?" 물어본다. 대답 못 한다. 지금 통장 잔고로는 결혼식 비용도 안 된다. 전세금? 꿈도 못 꾼다. "일단 커리어 좀 쌓고" 얼버무린다. 침대에 누워서 천장을 본다. 1년 뒤에도 이러고 있을까. 아니면 시니어가 되어 있을까. 연봉은 얼마나 오를까. 월세 말고 전세로 이사 갈 수 있을까. 불안하다. 엄청 불안하다. 그래도 출근하는 이유 목요일 오전. 사수가 내가 쓴 기획서를 보고 "이 부분 잘했네" 한다. 단 네 글자. 근데 기분이 좋다. 한 달은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회의에서 내 의견이 채택된다. "신기획님 말대로 이 플로우로 가죠." CTO가 말한다. 처음으로 기획자라는 게 뭔지 조금 알 것 같다. 사용자 경험을 설계한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퇴근길에 앱을 켠다. 내가 기획한 기능. 사용자 리뷰에 "이거 너무 편해요"라는 댓글. 스크린샷 찍는다. 노션에 저장한다. '성장의 흔적'이라는 폴더. 연봉은 적다. 월세는 비싸다. 통장 잔고는 항상 불안하다. 근데 그만두진 않는다. 아직은. 3년 차가 되면 4,000만 원은 받을 수 있을 거다. 5년 차면 5,000만 원. 시니어 기획자가 되면 7,000만 원. 팀장이 되면 1억. 숫자를 세어본다. 희망회로인 걸 알지만 돌린다. 지금은 50만 원 월세에 6평 원룸이지만, 언젠가는 전세로 이사 갈 것이다. 지금은 사수 눈치 보지만, 언젠가는 내가 사수가 될 것이다. 지금은 불안하지만, 언젠가는 자신감을 가질 것이다. 언젠가는. 그때까지 버틴다. 금요일 밤, 편의점 도시락 퇴근하고 집 앞 편의점. 도시락 코너에서 5분 고민한다. 6,500원짜리 제육볶음 vs 4,500원짜리 김치볶음밥. 2,000원 차이인데 고민된다. 이게 현실이다. 김치볶음밥 선택. 계산대에서 카드 긁는다. 삑 소리. 남은 한도 확인 안 한다. 무섭다. 원룸 문을 연다. 인덕션에 도시락 데운다. 노트북 켜서 넷플릭스 틀고 혼자 먹는다. 이게 27살 주니어 기획자의 금요일 밤. 내일은 토이 프로젝트 해야지. 모레는 부모님 댁 가야지. 다음 주는 기획서 마감이지. 월요일은 회의 3개. 계속 생각한다. 도시락을 다 먹는다. 쓰레기통에 버린다. 침대에 눕는다. 핸드폰으로 채용공고를 본다. '시니어 기획자, 연봉 5000~7000'. 저장한다. 2년 뒤엔 지원해보자. 불을 끈다. 어둠 속에서 생각한다. 나 잘하고 있는 거 맞나. 이 길이 맞나. 언제쯤 여유로워질까. 답은 없다. 내일도 출근한다. 그게 전부다.월세 50만 원, 연봉 3600만 원. 숫자로 보면 빠듯하지만, 그래도 산다. 불안하지만 버틴다. 이게 지금의 전부다.
- 12 Dec, 2025
년차별로 보는 기획자의 성장 단계, 나는 어디쯤?
2년차인데 1.5년차 같은 기분 오늘 사수가 물었다. "2년 됐는데 아직도 이런 거 물어봐?" 뭘 물어봤냐면. PRD에 '비즈니스 임팩트' 써야 하는데 어떻게 쓰는지 몰라서였다. 사수 표정이 묘했다. 실망한 것도 아니고, 화난 것도 아니고. 그냥 "아 그래?" 하는 느낌. 집에 와서 계속 생각했다. 나는 2년차다. 근데 왜 1.5년차 같지. 아니 솔직히 1년차 같을 때도 있다. 검색했다. "기획자 년차별 역량". 나왔다. 1년차는 이거, 2년차는 저거, 3년차는 그거. 표 깔끔하게 정리된 블로그 글 많더라. 읽으면서 식은땀 났다.1년차: 기획서 양식이 뭔지 모르던 시절 입사 첫날. 사수가 노션 링크 하나 보냈다. "여기 템플릿 있어. 이거 보고 써봐." 템플릿 열었다.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배경 및 목적 AS-IS / TO-BE 요구사항 정의 화면 정의서 플로우 차트 비기능 요구사항"비기능 요구사항이 뭐지?" 검색했다. 나왔다. 성능, 보안, 확장성. 그래서 뭘 어떻게 쓰라고? 그때는 진짜 아무것도 몰랐다. 회의록도 못 썼다. 누가 뭐라고 했는지는 받아적는데, 이게 중요한 건지 아닌지 몰라서 다 적었다. A4 5장. 사수가 봤다. "이거 다 필요한 거야?" 몰랐다. 그냥 다 적었다. 1년차 때 배운 것:기획서는 양식이 있다 회의록은 결론 위주로 쓴다 개발자한테 물어보기 전에 검색부터 "확인해보겠습니다" 만능 문장근데 이게 다였다. 1년 내내.2년차: 논리는 알겠는데 설득은 어려움 지금. 2년 3개월. 이제 기획서는 쓴다. 양식도 안다. 화면 정의서도 그린다. 피그마로 와이어프레임도 만든다. 근데. 회의 때 개발팀장이 물었다. "이거 왜 이렇게 기획했어요?" "...사용자가 편할 것 같아서요." "데이터 있어요?" 없다. "그럼 개발 공수는 고려했어요?" 안 했다. 팀장이 웃었다. 비웃는 게 아니라 그냥 웃었다. "다음엔 먼저 물어봐요." 창피했다. 2년차 되면 달라질 줄 알았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근데 아직도 "그냥 좋을 것 같아서"에서 못 벗어났다. 블로그 글들 보면 2년차는 이래야 한대:데이터 기반 의사결정 이해관계자 설득 우선순위 판단 대안 제시나는 4개 중에 0.5개 한다. 우선순위는 좀 안다. 급한 거 먼저. 그 정도. 사수가 말했다. "넌 손은 빠른데 머리가 안 따라와." 맞는 말이다.3년차는 어떤 느낌일까 3년차 선배가 있다. 다른 팀. 걔는 다르다. 회의 때 개발자가 "이거 안 돼요" 하면 바로 대안 낸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때요?" 개발자가 고개 끄덕인다. 데이터도 들고 온다. "지난달 전환율이 3.2%인데, 이거 개선하면 4% 갈 것 같아요." 숫자로 말한다. 나는 숫자가 없다. "좀 나아질 것 같아요." 이게 끝이다. 3년차 선배한테 물어봤다. "어떻게 그렇게 해요?" "음... 많이 깨져봐서?" 도움 안 되는 답변. "근데 넌 2년차치고 잘하는 편이야. 나 2년차 땐 더 못했어." 위로인지 진심인지 모르겠다. 검색한 3년차 역량:프로젝트 리딩 주니어 멘토링 전략 수립 크로스펑셔널 커뮤니케이션1년 뒤에 저거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모르겠다. 나는 지금 어디쯤인가 엑셀 켰다. 표 만들었다. 년차별 역량 체크리스트. 1년차 항목: 기획서 양식 이해 회의록 작성 화면 정의서 작성 기본 커뮤니케이션2년차 항목:[△] 데이터 분석 (SQL 아직 어려움) [△] 논리적 설득 (가끔 됨) 와이어프레임 제작 [△] 이해관계자 조율 (사수 도움 필요) 우선순위 판단 (혼자 못함) 프로젝트 단독 진행절반. 2년차인데 1.75년차 정도. 근데 이게 문제인가? 사수가 말했다. "성장은 계단이 아니라 곡선이야." 무슨 소린지 몰랐는데 요즘 알 것 같다. 1년 차에서 2년 차로 딱 넘어가는 게 아니다. 어떤 날은 2.5년차처럼 일하고, 어떤 날은 0.5년차처럼 무너진다. 어제 화면 정의서 30분 만에 끝냈다. 사수가 "수정사항 없네" 했다. 3년차 느낌. 오늘 개발자한테 "이거 가능해요?" 물어봤다. "그 정도는 직접 판단해봐요." 돌아왔다. 1년차 느낌. 곡선이 맞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블로그 글 보면 답 나온다. "꾸준히 성장하세요", "데이터 공부하세요", "멘토 찾으세요". 맞는 말이다. 근데 위로는 안 된다. 나는 그냥 2년차다. 1.5년차 같기도 하고, 2년차 같기도 하고, 가끔 3년차 흉내도 낸다. 내일 출근하면 또 사수한테 물어볼 것이다. "이거 어떻게 써요?" 쪽팔리다. 근데 뭐 어쩌나. 모르는 걸. 1년 뒤에는 3년차 선배처럼 될까? 모르겠다. 근데 1년 전보단 나아졌다. 그건 확실하다. 기획서 쓸 때 양식 검색 안 한다. 머릿속에 있다. 회의 때 받아적기만 하던 나는 이제 질문도 한다. 가끔. 곡선이 맞다. 계단 아니다. 오늘은 1.8년차 기분. 내일은 2.1년차일지도. 그냥 간다. 출근한다. 기획서 쓴다. 깨진다. 배운다. 언젠간 3년차 되겠지.2년차인데 1.5년차 같아도 괜찮다. 곡선이니까.
- 11 Dec, 2025
7시 반에 나가면서 하는 죄책감
7시 28분 책상 정리한다. 노션 창 닫고, 슬랙 상태 "자리비움" 설정. 가방에 노트북 넣는다. 지퍼 소리 최대한 작게. 고개 들어 주위 본다. 사수는 화면 두 개 켜놓고 뭔가 타이핑 중. 팀장은 회의실에서 통화한다. 개발자 두 명은 헤드폰 끼고 코딩. 10시 출근이다. 정시 퇴근은 7시. 지금 7시 28분. 30분 야근한 셈이다. 그런데 왜 죄책감이 드나.일어서는 순간 의자 뒤로 민다. 삐걱 소리. 사수가 고개 든다. "먼저 가요?" "아, 네. 수고하셨습니다." "응, 들어가." 사수는 다시 화면 본다. 나는 웃으면서 고개 숙인다. 속으로 센다. 3초. 돌아선다. 복도 나오면서 생각한다. '들어가'는 뭔가. '가'도 아니고. 배려인가, 눈치인가. 모르겠다. 엘리베이터 기다린다. 1층에서 올라온다. 느리다. 뒤에서 문 여는 소리. 심장 뛴다. 다른 팀 사람이다. 인사한다. 지하철 안 7호선 타고 집에 간다. 40분 걸린다. 의자 앉는다. 폰 꺼낸다. 슬랙 확인. 사수가 DM 보냈다. "내일 오전에 이거 같이 보자" 파일 첨부. 열어본다. 내가 오늘 쓴 화면 정의서. 빨간 줄 가득. 한숨 나온다. 7시 반에 나온 게 미안해진다. 30분 더 있었으면 오늘 끝낼 수 있었나. 아니다. 사수도 7시 반에 이거 본 건 아니다. 아마 8시쯤? 창밖 본다. 어둡다. 12월이라 5시부터 어둡다. 퇴근길은 항상 밤이다.선배 말 입사 첫 달. 선배가 말했다. "여기 10시 출근이야. 그러니까 7시 퇴근해도 돼. 눈치 보지 마." 고마웠다. 진짜 7시에 나갔다. 일주일. 그다음 주. 선배가 물었다. "요즘 7시에 나가?" "네, 괜찮다고 하셔서요." "아, 응. 괜찮아. 근데 다들 8시쯤 나가긴 하거든." 그 뒤로 7시 반에 나간다. 애매한 시간이다. 정시보단 늦고, 팀 평균보단 이르다. 사수는 사수는 8시 반에 나간다. 매일. 비 와도, 눈 와도. 10시 출근이니까 10시간 반 일한다. 한 번 물어봤다. "형, 왜 매일 8시 반이에요?" "응? 그냥. 할 거 하다 보면 그렇게 돼." 할 거. 나도 할 거 많다. 근데 8시 반까지는 못 남는다. 집에 가고 싶다. 여자친구 보고 싶다. 유튜브 보고 싶다. 사수는 미혼이다. 혼자 산다. 집에 가도 할 거 없다고 했다. 그래서 회사에 있는다고. 나는 다르다. 집에 할 거 많다. 빨래, 설거지, 유튜브, 여자친구 전화, 토이 프로젝트. 근데 회사 일이 우선 아닌가.팀장은 팀장은 9시에 나간다. 가끔 10시. 회의 때 말한다. "다들 일찍 퇴근하세요. 워라밸 중요해요." 근데 본인은 9시에 나간다. 모순이다. 아니면 9시가 일찍인가. 한 번 7시에 나가려고 했다. 팀장이 불렀다. "신기획님, 잠깐만요." 순간 식은땀. "네." "이거 내일까지 부탁해요. 급한 거라." "알겠습니다." 그날 8시 반에 나갔다. 급한 거였다. 어쩔 수 없다. 근데 다음 날. 그 자료 회의에서 안 쓰였다. 급한 게 아니었나. 모르겠다. 개발팀은 개발자들은 7시에 나간다. 칼퇴. 눈치 안 본다. 부럽다. 왜 기획자는 못 나가나. 개발자 선배한테 물어봤다. "형들은 왜 칼퇴 가능해요?" "우리? 코드 짜는 게 있으면 내일 하면 되잖아. 머리 아프면 더 오래 걸려." 맞는 말이다. 근데 기획도 마찬가지 아닌가. 머리 아프면 기획도 이상해진다. 차이는 이거다. 개발은 "내일 하면 돼"가 통한다. 기획은 "오늘 해야 돼"가 많다. 왜? 기획이 늦으면 개발이 늦는다. 개발이 늦으면 출시가 늦는다. 그래서 기획은 항상 쫓긴다. 여자친구 말 여자친구는 마케터다. 6시 퇴근. 진짜 6시에 나온다. 통화한다. 7시 반쯤. "오빠 퇴근?" "응, 지금 지하철." "오늘도 야근?" "야근까진 아니고." "7시 반이면 야근이지." 말문 막힌다. 맞다. 7시 반은 야근이다. 30분. 근데 회사에선 야근이 아니다. "거기 왜 그래? 10시 출근인데." "다들 이렇게 있어." "그럼 오빠만 먼저 나오면 안 돼?" "음..." 안 된다는 건 아니다. 근데 안 된다. 왜? 모르겠다. 분위기? 분위기란 분위기는 룰이 아니다. 근데 룰보다 강하다. 회사 공식 퇴근은 7시. 근데 실제 퇴근은 8시. 누가 정한 건 아니다. 그냥 다들 그렇게 한다. 7시에 나가면 뭐라고 하나? 아니다. 아무도 뭐라 안 한다. 그게 더 무섭다. 칼퇴하는 직원한테 뭐라고 하는 회사. 그건 나쁜 회사다. 명확하다. 칼퇴해도 아무 말 없는데, 왠지 눈치 보이는 회사. 이게 더 애매하다. 나쁜 건 아니다. 근데 좋은 것도 아니다. 죄책감의 정체 7시 반에 나간다. 왜 죄책감이 드나. 일을 덜 해서? 아니다. 9시간 반 일했다. 충분하다. 사수가 뭐라고 해서? 아니다. 사수는 "들어가" 했다. 팀 분위기? 이게 맞다. 다들 8시 넘어 나가는데, 나만 7시 반. 이 차이. 30분이다. 겨우 30분. 근데 이 30분이 크다. 30분 더 있으면: 화면 정의서 한 장 더. 회의록 정리. 내일 할 일 미리 보기. 30분 일찍 나오면: 지하철 덜 붐빔. 집에 일찍 도착. 개인 시간 확보. 어느 게 맞나. 모르겠다. 2년 차 선배 2년 차 선배 있다. 나보다 1년 빠르다. 그 선배가 말했다. "나도 1년 차 땐 눈치 봤어. 7시에 못 나갔어." "지금은요?" "지금? 7시 10분에 나가. 딱 10분만 눈치 본다." 웃겼다. 근데 공감됐다. "형, 언제부터 괜찮아졌어요?" "음. 일 잘하면 괜찮아져." 일을 잘하면. 그럼 나는 아직 일을 못하나. 맞다. 사수한테 빨간 줄 받는다. 아직 멀었다. 결국 실력이다. 실력 있으면 7시에 나가도 뭐라 안 한다. 실력 없으면 8시에 나가도 눈치 보인다. 내일은 내일도 7시 반에 나갈 것이다. 모레도. 계속. 언젠간 7시에 나가고 싶다. 떳떳하게. 죄책감 없이. 그러려면 일을 잘해야 한다. 빨간 줄 덜 받아야 한다. 사수한테 "이거 괜찮은데?" 들어야 한다. 그때까지는 7시 반. 애매한 시간. 야근도 아니고, 칼퇴도 아닌. 근데 괜찮다. 1년 차니까. 배우는 중이니까.7시 28분. 가방 챙긴다. 내일도.
- 10 Dec, 2025
Figma는 봐도 모르겠고, Notion은 자신만만한 이유
회의실에서 얼어붙는 순간 오전 10시 30분. 디자이너가 피그마 화면을 공유했다. "여기 컴포넌트를 이렇게 변형해서요, 인스턴스를 찍으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듣는 척이다. 화면에는 보라색 선과 파란색 박스가 겹쳐 있다. 뭔가 움직인다. 클릭할 때마다 화면이 바뀐다. 신기하긴 한데,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신기획님, 이 부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 네. 좋은 것 같습니다." 대답은 했다. 뭐가 좋은지는 모른다.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왔다. 피그마 파일 링크가 슬랙에 떴다. 열어봤다. 여전히 모르겠다. 레이어가 100개다. 뭘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사수한테 물어볼까 했다. 참았다. "피그마 모르세요?" 들을까 봐. 노션만은 자신 있다 점심 먹고 돌아왔다. 사수가 불렀다. "신기획님, 이거 구조 좀 봐요." 노션 페이지가 열렸다. 토글이 접혀 있다. 하나씩 펼친다. 구조가 보인다. "여기가 사용자 플로우고, 여기가 예외 케이스죠. 이 부분 추가해줘요." "네, 알겠습니다." 이건 안다. 토글 만들고, 데이터베이스 추가하고, 템플릿 복사하면 된다. 30분 만에 끝냈다. 사수한테 보여줬다. "오, 빠르네요. 잘했어요." 기분이 좋았다.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노션은 입사 첫날부터 썼다. 회의록도 노션, 기획서도 노션, 개인 정리도 노션이다. 1년 반 동안 매일 썼다. 단축키는 다 외웠다. /으로 시작하는 명령어는 눈 감고도 친다.회사가 노션을 쓴다는 게 다행이다. 만약 컨플루언스였으면 나는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깊이의 문제 퇴근하고 집에 왔다. 유튜브를 켰다. 피그마 강의가 떴다. "왕초보를 위한 피그마 기초" 25분짜리 영상이다. 봤다. 오토 레이아웃이 뭔지 설명한다. 이해는 됐다. 그런데 따라 하기는 싫다. 왜 안 하냐고? 모르겠다. 그냥 재미가 없다. 노션은 달랐다. 처음 썼을 때부터 재밌었다. 페이지 만들고, 링크 걸고, 구조 잡는 게 게임 같았다. 퇴근하고도 개인 노션 정리했다. 독서 기록, 강의 정리, 일기까지 다 노션이다. 피그마는 그게 안 된다. 열면 숙제 같다. 사실 알고 있다. 내가 깊이 있게 배운 게 노션뿐이라는 걸. 피그마는 "봐야 하는 것"이다. 노션은 "하고 싶은 것"이었다. 차이는 거기서 온다. 회의 중에 개발자가 말했다. "이 기능 API 어떻게 설계할 건가요?" "아... 그건 개발팀에서 정해주시면..." 개발자가 웃었다. 비웃은 건 아닌데, 그렇게 느껴졌다. 집에 와서 API 검색했다. 30분 읽었다. 어렵다. 창 닫았다. 노션 켰다. 오늘 회의록 정리했다. 30분 만에 끝났다. 깔끔하다. 뿌듯하다. 노션으로 먹고사는 사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노션 장인이다. 회사에서 템플릿 만들어달라고 하면 나한테 온다. 신입이 노션 쓰는 법 물어보면 내가 알려준다. 사수도 가끔 "이거 어떻게 해요?" 물어본다. 노션 커뮤니티에도 가입했다. 템플릿 공유하고, 댓글 달고, 팁 올린다. 좋아요 100개 받은 적도 있다. 그런데 이게 자랑은 아니다. 기획자인데 노션만 잘하면 뭐 하나.지난주에 면접 봤다. 이직 알아보는 중이다. "어떤 툴 쓸 줄 아세요?" "노션이랑 피그마요." "피그마는 어느 정도?" "화면 보고 이해하는 정도요." "직접 만들어보신 적은?" "아니요." 떨어졌다. 합격한 곳은 "노션 잘 쓰시네요" 하면서도 "피그마 좀 배워보세요" 했다. 알고 있다. 내가 회피하고 있다는 걸. 편한 곳에만 있는 이유 왜 노션만 파는가. 쉬워서다. 아니, 익숙해서다. 피그마 열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노션 열면 바로 시작한다. 손이 움직인다. 생각이 정리된다. 개발 공부도 마찬가지다. SQL 배워야 한다는 건 안다. 검색하면 강의 100개 나온다. 그런데 시작을 안 한다. "나중에 해야지" 하고 노션 켠다. 할 일 목록 정리한다. 정리하다 보면 2시간 지났다. 생산적인 것 같지만 아니다. 도망치는 거다. 사수가 말했다. "신기획님은 정리는 잘하는데, 제안은 약해요." 뜨끔했다. 맞다. 나는 받아쓰기는 잘한다. 회의록 정리, 기획서 양식 만들기, 자료 아카이빙. 이런 건 칭찬받는다. 그런데 "이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물으면 막힌다. 노션으로 정리는 하는데, 머릿속은 안 정리된다. 불편한 것과 친해지기 어제 결심했다. 피그마 30분씩 매일 만진다. 만지기만 한다. 결과물은 안 본다. 오늘 첫날이다. 타이머 맞췄다. 30분. 사각형 그렸다. 색 바꿨다. 오토 레이아웃 적용했다. 버튼 만들었다. 못생겼다. 상관없다. 30분 끝났다. 닫았다. 내일도 할 거다. SQL도 마찬가지다. 일주일에 쿼리 10개 쓴다. 답 틀려도 된다. 검색해도 된다. 그냥 친해지는 게 목표다. 노션은 줄인다. 하루 1시간만 쓴다. 정리는 간단하게. 나머지 시간은 불편한 것 만진다. 사수한테도 말했다. "피그마 배우고 싶은데, 간단한 작업 주시면 해볼게요." "오, 좋아요. 이거 해봐요." 화면 정의서 대신 피그마로 그려보라고 했다. 오늘 저녁까지. 지금 5시다. 아직 반도 못 했다. 그래도 한다. 자신감의 역설 노션 잘한다고 자신감 생기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다. "이것밖에 못 해" 하는 생각이 자신감을 깎는다. 피그마 모르는 게 부끄럽다. 개발 모르는 게 부끄럽다. 데이터 분석 못 하는 게 부끄럽다. 그런데 피그마 잘하는 사람도 노션은 못 한다. 개발자도 기획서는 못 쓴다. 디자이너도 SQL은 모른다. 모두가 뭔가는 못한다. 차이는 뭔가. 못하는 걸 배우려고 하느냐, 안 하느냐. 나는 1년 반 동안 안 했다. 노션으로 숨었다. 이제는 한다. 매일 30분씩. 불편한 것과 친해진다.노션 장인도 좋지만, 기획자가 되려면 불편한 것부터 배워야 한다. 30분씩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