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gma는 봐도 모르겠고, Notion은 자신만만한 이유
- 10 Dec, 2025
회의실에서 얼어붙는 순간
오전 10시 30분. 디자이너가 피그마 화면을 공유했다.
“여기 컴포넌트를 이렇게 변형해서요, 인스턴스를 찍으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듣는 척이다.
화면에는 보라색 선과 파란색 박스가 겹쳐 있다. 뭔가 움직인다. 클릭할 때마다 화면이 바뀐다. 신기하긴 한데,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신기획님, 이 부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 네. 좋은 것 같습니다.”
대답은 했다. 뭐가 좋은지는 모른다.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왔다. 피그마 파일 링크가 슬랙에 떴다. 열어봤다. 여전히 모르겠다. 레이어가 100개다. 뭘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사수한테 물어볼까 했다. 참았다. “피그마 모르세요?” 들을까 봐.
노션만은 자신 있다
점심 먹고 돌아왔다. 사수가 불렀다.
“신기획님, 이거 구조 좀 봐요.”
노션 페이지가 열렸다. 토글이 접혀 있다. 하나씩 펼친다. 구조가 보인다.
“여기가 사용자 플로우고, 여기가 예외 케이스죠. 이 부분 추가해줘요.”
“네, 알겠습니다.”
이건 안다. 토글 만들고, 데이터베이스 추가하고, 템플릿 복사하면 된다.
30분 만에 끝냈다. 사수한테 보여줬다.
“오, 빠르네요. 잘했어요.”
기분이 좋았다. 이 정도는 할 수 있다.
노션은 입사 첫날부터 썼다. 회의록도 노션, 기획서도 노션, 개인 정리도 노션이다. 1년 반 동안 매일 썼다. 단축키는 다 외웠다. /으로 시작하는 명령어는 눈 감고도 친다.

회사가 노션을 쓴다는 게 다행이다. 만약 컨플루언스였으면 나는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깊이의 문제
퇴근하고 집에 왔다. 유튜브를 켰다. 피그마 강의가 떴다.
“왕초보를 위한 피그마 기초”
25분짜리 영상이다. 봤다. 오토 레이아웃이 뭔지 설명한다. 이해는 됐다. 그런데 따라 하기는 싫다.
왜 안 하냐고? 모르겠다. 그냥 재미가 없다.
노션은 달랐다. 처음 썼을 때부터 재밌었다. 페이지 만들고, 링크 걸고, 구조 잡는 게 게임 같았다. 퇴근하고도 개인 노션 정리했다. 독서 기록, 강의 정리, 일기까지 다 노션이다.
피그마는 그게 안 된다. 열면 숙제 같다.
사실 알고 있다. 내가 깊이 있게 배운 게 노션뿐이라는 걸.
피그마는 “봐야 하는 것”이다. 노션은 “하고 싶은 것”이었다. 차이는 거기서 온다.
회의 중에 개발자가 말했다.
“이 기능 API 어떻게 설계할 건가요?”
“아… 그건 개발팀에서 정해주시면…”
개발자가 웃었다. 비웃은 건 아닌데, 그렇게 느껴졌다.
집에 와서 API 검색했다. 30분 읽었다. 어렵다. 창 닫았다.
노션 켰다. 오늘 회의록 정리했다. 30분 만에 끝났다. 깔끔하다. 뿌듯하다.
노션으로 먹고사는 사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노션 장인이다.
회사에서 템플릿 만들어달라고 하면 나한테 온다. 신입이 노션 쓰는 법 물어보면 내가 알려준다. 사수도 가끔 “이거 어떻게 해요?” 물어본다.
노션 커뮤니티에도 가입했다. 템플릿 공유하고, 댓글 달고, 팁 올린다. 좋아요 100개 받은 적도 있다.
그런데 이게 자랑은 아니다.
기획자인데 노션만 잘하면 뭐 하나.

지난주에 면접 봤다. 이직 알아보는 중이다.
“어떤 툴 쓸 줄 아세요?”
“노션이랑 피그마요.”
“피그마는 어느 정도?”
“화면 보고 이해하는 정도요.”
“직접 만들어보신 적은?”
“아니요.”
떨어졌다.
합격한 곳은 “노션 잘 쓰시네요” 하면서도 “피그마 좀 배워보세요” 했다.
알고 있다. 내가 회피하고 있다는 걸.
편한 곳에만 있는 이유
왜 노션만 파는가.
쉬워서다. 아니, 익숙해서다.
피그마 열면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노션 열면 바로 시작한다. 손이 움직인다. 생각이 정리된다.
개발 공부도 마찬가지다. SQL 배워야 한다는 건 안다. 검색하면 강의 100개 나온다. 그런데 시작을 안 한다.
“나중에 해야지” 하고 노션 켠다. 할 일 목록 정리한다. 정리하다 보면 2시간 지났다.
생산적인 것 같지만 아니다. 도망치는 거다.
사수가 말했다.
“신기획님은 정리는 잘하는데, 제안은 약해요.”
뜨끔했다.
맞다. 나는 받아쓰기는 잘한다. 회의록 정리, 기획서 양식 만들기, 자료 아카이빙. 이런 건 칭찬받는다.
그런데 “이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물으면 막힌다.
노션으로 정리는 하는데, 머릿속은 안 정리된다.
불편한 것과 친해지기
어제 결심했다.
피그마 30분씩 매일 만진다. 만지기만 한다. 결과물은 안 본다.
오늘 첫날이다. 타이머 맞췄다. 30분.
사각형 그렸다. 색 바꿨다. 오토 레이아웃 적용했다. 버튼 만들었다. 못생겼다. 상관없다.
30분 끝났다. 닫았다.
내일도 할 거다.
SQL도 마찬가지다. 일주일에 쿼리 10개 쓴다. 답 틀려도 된다. 검색해도 된다. 그냥 친해지는 게 목표다.
노션은 줄인다. 하루 1시간만 쓴다. 정리는 간단하게. 나머지 시간은 불편한 것 만진다.
사수한테도 말했다.
“피그마 배우고 싶은데, 간단한 작업 주시면 해볼게요.”
“오, 좋아요. 이거 해봐요.”
화면 정의서 대신 피그마로 그려보라고 했다. 오늘 저녁까지.
지금 5시다. 아직 반도 못 했다. 그래도 한다.
자신감의 역설
노션 잘한다고 자신감 생기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다.
“이것밖에 못 해” 하는 생각이 자신감을 깎는다.
피그마 모르는 게 부끄럽다. 개발 모르는 게 부끄럽다. 데이터 분석 못 하는 게 부끄럽다.
그런데 피그마 잘하는 사람도 노션은 못 한다. 개발자도 기획서는 못 쓴다. 디자이너도 SQL은 모른다.
모두가 뭔가는 못한다.
차이는 뭔가.
못하는 걸 배우려고 하느냐, 안 하느냐.
나는 1년 반 동안 안 했다. 노션으로 숨었다.
이제는 한다.
매일 30분씩. 불편한 것과 친해진다.
노션 장인도 좋지만, 기획자가 되려면 불편한 것부터 배워야 한다. 30분씩이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