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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
- 05 Jan, 2026
회의 중 고개 끄덕이기 vs 질문하기의 심리 전쟁
회의 중 고개 끄덕이기 vs 질문하기의 심리 전쟁 오늘도 고개만 끄덕였다 회의 시작. 10시 정각. 사수가 말한다. "이번 개편안은 유저 플로우 기반으로." 고개 끄덕인다. CTO가 말한다. "API 구조 먼저 정리해야죠." 고개 끄덕인다. 디자이너가 말한다. "인터랙션은 어떻게 할 거예요?" 고개 끄덕인다. 회의 끝. 1시간 20분. 노션에 받아적은 내용: 유저 플로우, API 구조, 인터랙션. 내가 뭘 해야 하는지는 모른다.질문하려다 입 다문 횟수: 7번 "유저 플로우 기반이요?" → 말하려다 말았다. 다들 아는 듯한 표정. "API 구조가 기획에도 영향을 주나요?" → 말하려다 말았다. 이런 것도 모르나 싶을까봐. "인터랙션 예시 좀 보여주실 수 있나요?" → 말하려다 말았다. 회의 길어지면 민폐. 입 열려다 닫은 횟수. 정확히 7번. 손가락으로 책상 밑에서 셌다. 입버릇처럼 나오는 말: "네 알겠습니다." 실제 상황: 하나도 모르겠습니다.혼자 구글링하는 시간: 2시간 회의 끝나고 자리로 돌아왔다. 일단 검색한다. "유저 플로우 기획서 예시" "API 구조 기획자가 알아야 하나" "인터랙션 디자인 가이드" 검색 결과 20개 탭. 다 읽는다. 블로그 읽다가 또 모르는 용어 나온다. "엔드포인트가 뭐지?" 검색 탭이 35개로 늘어난다. 2시간 지났다. 화면 정의서는 한 장도 안 그렸다. 사수가 지나가며 묻는다. "진행 어때?" "네, 잘 되고 있습니다." 거짓말이다.결국 헷갈려서 다시 한다 화면 정의서 1차 완성. 오후 5시. 사수한테 보낸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20분 뒤 피드백 온다. "이거 유저 플로우가 회의 때 얘기한 거랑 다른데?" "API 호출 시점이 이상한데?" "인터랙션 어디 갔어?" 머리가 하얘진다. 회의 때 정확히 이해 못 했으니까. 검색으로 대충 메운 거니까. 결국 다시 한다. 처음부터. 6시간 날렸다.'질문 잘하는 사람'을 관찰했다 옆팀 선배 기획자. 경력 4년차. 회의 때 관찰했다. 질문 횟수: 회의당 평균 5번. 특징: 다들 귀 기울인다. "이 부분 제가 이해한 게 맞나요? 확인차 여쭤볼게요." → 겸손하게 시작. "그럼 A 케이스일 때는 어떻게 되나요?" → 구체적으로 묻는다. "이게 개발 공수에 영향을 주나요?" → 실무적으로 확인한다. 아무도 '왜 이런 걸 물어봐' 안 한다. 오히려 감사해한다. "좋은 질문이네요." 나는 왜 질문 못 할까.질문 못 하는 진짜 이유 분석해봤다. 내가 질문 못 하는 이유.기초 지식 부족이 들킬까봐. 비전공이라 CS 모른다. 들키면 '왜 기획자 했어?' 들을까봐.회의 길어지면 민폐일까봐. 다들 바쁘다. 내 질문으로 10분 더 걸리면 욕먹을까봐.'혼자 알아서 하라'는 소리 들을까봐. 주니어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 질문하면 의존적으로 보일까봐.사수 기분 나쁘게 할까봐. "내가 설명 안 했어?" 이럴까봐. 사수 눈치 본다.결국 전부 '불안'이다. 질문 자체가 아니라, 질문 후의 반응이 무서운 거다.질문 안 하면 더 큰 민폐다 깨달은 거. 질문 안 해서 6시간 날린 게 더 민폐다. 회의 때 5분 질문했으면:2시간 검색 안 해도 됐다. 6시간 작업 안 날렸다. 사수 피드백 시간 안 뺏었다.결국 혼자 끙끙대다가:일정 지연. 퀄리티 저하. 팀 전체 발목 잡기.'질문하면 민폐'가 아니라, '질문 안 하면 민폐'다. 이걸 왜 이제 깨달았나.질문 연습을 시작했다 다음 회의부터 바꾸기로 했다. 질문 연습. 방법 1: 회의 전 질문 3개 준비.모르는 용어 미리 정리. "이 부분 확인하고 싶어요" 문장 준비. 최악의 경우 1개라도 묻기.방법 2: 질문 템플릿 만들기."제가 이해한 게 맞나요?"로 시작.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가요?" 확인. "이 경우는 어떻게 되나요?" 예외 케이스.방법 3: 사수한테 먼저 물어보기.회의 끝나고 "5분만 시간 되세요?" "회의 때 이 부분 이해 안 됐는데요." 사수가 먼저 설명해주면 회의 때 덜 긴장.시도해보기로 했다. 다음 회의. 화요일 오전 10시.첫 질문의 기록 화요일 회의. 손에 땀 난다. 준비한 질문 3개. 노션에 적어뒀다. 사수가 말한다. "이번 기능은 AB테스트로 검증." 손을 든다. 떨린다. "죄송한데요, AB테스트 기간은 얼마나 예상하세요?" 첫 질문 성공. 사수가 답한다. "보통 2주. 샘플 사이즈 보고 조정." 모르는 말 나왔다. "샘플 사이즈요? 그게 뭔가요?" 두 번째 질문. 사수가 웃으며 설명한다.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사용자 수. 나중에 따로 알려줄게." 기분 나빠 보이지 않는다. 회의 끝. 질문 2개 했다. 세상 안 무너졌다.달라진 것들 질문 시작한 지 2주. 변화 기록.작업 시간 줄었다.전: 기획서 1개에 8시간 (검색 2시간 + 작업 6시간) 후: 기획서 1개에 5시간 (작업 5시간)피드백 수정 줄었다.전: 피드백 평균 15개 후: 피드백 평균 7개사수가 먼저 물어본다."이해 안 되는 부분 없어?" "궁금한 거 있으면 바로 물어봐."자신감 생겼다.회의 때 당당해졌다. "이 부분 확인하고 싶습니다" 자연스럽게 나온다.질문이 무기가 됐다.여전히 어려운 순간들 하지만 여전히 어렵다. 대표님 앞에서는 질문 못 한다. "그것도 모르고 기획했어?" 들을까봐. 개발자한테도 조심스럽다. "기획자가 이것도 몰라?" 할까봐. 완벽하게 바뀌진 않았다. 여전히 고개 끄덕이고 나중에 검색할 때 있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낫다. 질문 0개에서 2개로. 2개에서 4개로. 조금씩 늘리는 중이다.고개 끄덕이기의 대가 계산해봤다. 질문 안 하고 고개만 끄덕인 대가.낭비한 시간: 주당 10시간 (검색 + 재작업) 지연된 일정: 월 2건 받은 피드백: 월 평균 60개 스트레스: 측정 불가. 엄청 많음.질문 5분이 아깝다고, 10시간을 날렸다. 회의 10분 길어지는 게 민폐라고, 팀 전체 일정을 지연시켰다. 이게 진짜 민폐다. 질문 안 하는 게.2년차가 되려면 목표가 생겼다. 2년차까지 질문 잘하는 기획자 되기. 기준은 이거다.회의당 질문 5개 이상. 모르는 거 바로 묻기. 사수한테 주 3회 이상 질문. 개발자한테도 겁 안 내고 묻기.질문이 많은 게 부끄러운 게 아니다. 질문 없이 일 못 하는 게 부끄러운 거다. 주니어는 질문이 일이다. 이제 알았다.질문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고 있었다. 이제 묻는다.
- 15 Dec, 2025
대학 동기 연인에게 '요즘 일은 어때?'라고 물었을 때 대답 못 했던 이유
카페에서 멍했다 여자친구가 물었다. "요즘 일은 어때?" 나는 3초 멍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응... 그냥... 뭐 기획서 쓰고..." 말이 끊겼다. 여자친구가 웃었다. 억지 웃음이었다. "너 무슨 일 하는지 모르겠어." 나도 모르겠다. 1년 사귄 사이다. 대학 동기. 같은 과 출신이 아니라서 전공 얘기는 안 통한다. 그래도 직장 생활 얘기는 하고 싶었다. 여자친구는 마케터다. SNS 컨텐츠 만들고, 광고 집행하고, 성과 보고한다. 한 문장으로 설명 가능하다. 나는? 기획자다. 뭐 하는 사람? 설명 못 한다.회사 가면 바쁜데 출근하면 할 일은 많다. 아침: 사수 피드백 확인. "이 부분 다시", "여기 근거 부족", "화면 구조 이상함". 오전: 회의 3개. 디자인 검토, 개발 일정, 마케팅 협의. 점심: 12시 30분. 사수랑 먹는다. "너 이거 왜 이렇게 했어?" 밥맛 없다. 오후: 화면 정의서 수정. 버튼 위치 바꾸고, 텍스트 수정하고, 플로우 다시 그리고. 저녁: 내일 회의 자료 준비. 7시 반 퇴근. 바쁘다. 진짜 바쁘다. 근데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나는 화면 정의서를 써." "화면 정의서가 뭔데?" "음... 앱 화면에 뭐가 있는지 정리하는 거." "그게 일이야?" 할 말이 없다.사수가 시키는 거 하는 건데 정확히는 사수가 준 업무를 한다. "이 기능 화면 정의서 써봐." "네." "이번 주 업데이트 내용 정리해." "네." "회의록 작성해." "네." 내가 기획한 게 아니다. 사수가 이미 방향 정했다. 나는 디테일만 채운다. 버튼 문구, 팝업 내용, 예외 상황 처리. 이런 것들. 기획자 맞나? 검색해봤다. "주니어 기획자 업무".상위 기획자의 지시에 따라 세부 기획 수행 회의록 작성 및 이슈 트래킹 화면 정의서, 플로우차트 작성맞긴 맞다. 근데 이게 자랑스럽게 말할 일인가? "나는 시키는 거 하는 사람이야." 이렇게 말하면 여자친구가 뭐라고 생각할까. 저번 주에 여자친구가 말했다. "우리 팀장님이 내 아이디어 채택했어. 이번 캠페인 메인 카피 내가 썼어." 나는 "대박"이라고만 했다. 부러웠다. 나는 언제 내 아이디어로 뭔가 해볼까.기획자가 뭐 하는 사람이에요? 면접 때도 물어봤다. 이 질문. 준비한 답이 있었다. "사용자 니즈를 파악해서 서비스를 설계하는 사람입니다." 합격했다. 지금 다시 물으면 못 대답한다. 사용자 니즈? 사수가 정한다. 데이터 보고 결정한다. 나는 그냥 따른다. 서비스 설계? 큰 틀은 이미 있다. 나는 세부만 채운다. 그럼 나는 뭐 하는 사람? 노션 문서 작성하는 사람. 피그마 컴포넌트 복붙하는 사람. 회의에서 받아적는 사람. 이게 기획자인가. 유튜브 봤다. "주니어 기획자의 하루". 다들 비슷하다. 사수 밑에서 배운다. 문서 작성한다. 회의 참석한다. 위안이 됐다.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근데 여자친구한테 이렇게 말하면? "나는 아직 배우는 단계야. 사수 밑에서." 27살인데 아직 배우는 중. 자괴감 든다. 개발자가 "이거 안 돼요" 하면 제일 무서운 순간이다. 화면 정의서 다 썼다. 사수 검토 받았다. 개발팀 전달했다. 개발자가 메시지 보냈다. "신기획님, 이 기능은 구현 어려울 것 같은데요." 심장이 멈췄다. "아...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요?" "기획 다시 해주셔야죠." 대안이 없다. 왜 안 되는지 이해도 안 된다. 기술적으로 어렵다는데 뭐라고 반박하지? 사수한테 물었다. "이거 개발자가 어렵대요." "왜?" "기술적으로..." "구체적으로 뭐가 어렵다고?" 모른다. 안 물어봤다. "다시 물어봐." 개발자한테 다시 물었다. 설명 들었다. API 구조, DB 스키마, 캐싱 문제. 하나도 모르겠다. "아... 네. 그럼 제가 다시 기획해볼게요." 어떻게? 검색했다. "기획자 기술 지식". 다들 SQL 배우래. 개발 프로세스 이해하래. 주말에 SQL 강의 들었다. SELECT, WHERE, JOIN. 이해는 했다. 근데 실무에서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다. 여자친구가 물으면 뭐라고 하지? "나는 개발자랑 소통 잘 안 돼." 이렇게 말하면 무능해 보인다. 말 안 하는 게 낫다. 회의 때 고개만 끄덕였다 이번 주 회의. 신규 기능 논의. 팀장: "이 기능 어떻게 생각해요?" 디자이너: "UI 측면에서는..." 개발자: "기술적으로는..." 마케터: "유저 반응은..." 나: "..." 팀장이 날 봤다. "신기획님 생각은?" "아... 저는... 좋은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음... 사용자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요." 팀장이 웃었다. "근거는?" "..." 사수가 끼어들었다.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창피했다. 회의 끝나고 사수가 말했다. "회의 전에 미리 생각 좀 해와." "네... 죄송합니다." "미안해하지 말고 준비해." 준비를 어떻게 하지? 데이터 봐야 한다는데 어떤 데이터? GA 보는 법도 잘 모른다. 유저 리서치 해야 한다는데 어떻게? 설문지 만드는 법도 모른다. 경쟁사 분석 해야 한다는데 뭘 봐야 하지? 그냥 앱 다운받아서 써보는 게 다인가?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여자친구 친구들 만난 적 있다. 다들 직장 얘기한다. "우리 팀장님이 내 제안 채택했어." "이번 프로젝트 내가 리드했어." "고객사 미팅에서 내가 발표했어." 나는? "회의에서 받아적었어." 말 안 했다. PRD 양식 찾아서 따라 썼는데 사수가 말했다. "다음 기능부터는 네가 PRD 작성해봐." "네." PRD가 뭔지 검색했다. Product Requirement Document. 제품 요구사항 문서. 양식 검색했다. 수십 개 나왔다. 다 달랐다.목적/배경 타겟 유저 핵심 기능 성공 지표 일정/리소스이런 항목들. 그럴듯했다. 따라 썼다. 목적: 사용자 편의성 향상 타겟 유저: 20~30대 여성 핵심 기능: 원클릭 구매 성공 지표: 구매 전환율 10% 상승 사수한테 보냈다. 피드백 왔다. "왜 사용자 편의성 향상이 목적이야? 비즈니스 목표는?" "왜 20~30대 여성이 타겟이야? 데이터 근거는?" "원클릭 구매가 왜 핵심 기능이야? 다른 대안은 검토했어?" "구매 전환율 10% 상승. 왜 10%야? 현재가 몇 %인데?" 대답 못 했다. 그냥... 다른 PRD 보고 비슷하게 썼다. 사수가 말했다. "양식 채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왜 이걸 해야 하는지 설득하는 게 중요해." "네..." "다시 써봐. 이번엔 데이터부터 찾아보고." 데이터를 어디서 찾지? GA 열었다. 수치만 가득했다. 뭘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노션 검색했다. 과거 PRD 찾아봤다. 선배들이 쓴 거. 구조 분석했다. 아. 이렇게 쓰는 거구나. 다시 썼다. 3일 걸렸다. 사수: "나아졌네. 근데 여기 로직 좀 이상한데?" 또 수정. 이게 맞는 건가? 여자친구가 물으면? "나는 문서 쓰는데 시간 다 쓴다." 이렇게 말하면 한심해 보인다. 1년 뒤에도 이러고 있으면 무서운 생각이 든다. 지금 2년차. 3년차 되면 달라질까? 선배 기획자 봤다. 4년차. 여전히 사수한테 검토받는다. 여전히 회의에서 눈치 본다. 달라진 건? 문서 쓰는 속도. 그게 다. 10년차 기획자 링크드인 봤다. "주도적으로 프로덕트 방향 설정". 멋있다. 나는 언제 저렇게 되지? 유튜브에서 "시니어 기획자 vs 주니어 기획자" 봤다. 주니어: 화면 그린다. 문서 작성한다. 지시 받는다. 시니어: 방향 제시한다. 데이터 분석한다. 의사결정한다. 나는 주니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토이 프로젝트 해본다. 주말에. "나만의 앱 기획하기". PRD 써본다. 화면 그려본다. 근데 이게 실무에서 통할까? 모르겠다. 확신이 없다. 여자친구한테 솔직하게 다음 주 만났다. 카페. 여자친구가 또 물었다. "요즘 일은 어때?" 이번엔 솔직하게 말했다. "잘 모르겠어. 나 지금 뭐 하는 사람인지." "무슨 소리야?" "회사 가면 바쁜데 남한테 설명 못 하겠어. 내가 기획한 것도 없고. 사수가 시키는 거 하고. 회의에서 할 말도 없고." 여자친구가 웃었다. 이번엔 진짜 웃음이었다. "나도 그래." "너도?" "1년차 때 그랬어. 나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고. 팀장님 시키는 것만 하고. 내 아이디어라고 할 것도 없고." "진짜?" "응. 근데 2년차 되니까 좀 보이더라. 내가 뭘 배우고 있는지." 위로가 됐다. "너 뭐 배우고 있는데?" "문서 쓰는 법. 개발자랑 대화하는 법. 데이터 보는 법. 회의에서 의견 내는 법." 맞다. 나도 배우고 있다. 당장 잘하는 건 아니지만. "그럼 너 지금 일 괜찮은 거야?" "응. 힘들긴 한데 배우는 중이야." 여자친구가 웃었다. "그렇게 말하면 되지." 그렇구나. "요즘 일은 어때?" "힘든데 배우는 중." 이렇게 대답하면 되는 거였다. 완벽하지 않아도. 뭔가 대단한 거 하지 않아도. 배우고 있으면 되는 거.말 못 하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 배우는 중이라고 말 못 하는 게 부끄러운 거였다.
- 11 Dec, 2025
7시 반에 나가면서 하는 죄책감
7시 28분 책상 정리한다. 노션 창 닫고, 슬랙 상태 "자리비움" 설정. 가방에 노트북 넣는다. 지퍼 소리 최대한 작게. 고개 들어 주위 본다. 사수는 화면 두 개 켜놓고 뭔가 타이핑 중. 팀장은 회의실에서 통화한다. 개발자 두 명은 헤드폰 끼고 코딩. 10시 출근이다. 정시 퇴근은 7시. 지금 7시 28분. 30분 야근한 셈이다. 그런데 왜 죄책감이 드나.일어서는 순간 의자 뒤로 민다. 삐걱 소리. 사수가 고개 든다. "먼저 가요?" "아, 네. 수고하셨습니다." "응, 들어가." 사수는 다시 화면 본다. 나는 웃으면서 고개 숙인다. 속으로 센다. 3초. 돌아선다. 복도 나오면서 생각한다. '들어가'는 뭔가. '가'도 아니고. 배려인가, 눈치인가. 모르겠다. 엘리베이터 기다린다. 1층에서 올라온다. 느리다. 뒤에서 문 여는 소리. 심장 뛴다. 다른 팀 사람이다. 인사한다. 지하철 안 7호선 타고 집에 간다. 40분 걸린다. 의자 앉는다. 폰 꺼낸다. 슬랙 확인. 사수가 DM 보냈다. "내일 오전에 이거 같이 보자" 파일 첨부. 열어본다. 내가 오늘 쓴 화면 정의서. 빨간 줄 가득. 한숨 나온다. 7시 반에 나온 게 미안해진다. 30분 더 있었으면 오늘 끝낼 수 있었나. 아니다. 사수도 7시 반에 이거 본 건 아니다. 아마 8시쯤? 창밖 본다. 어둡다. 12월이라 5시부터 어둡다. 퇴근길은 항상 밤이다.선배 말 입사 첫 달. 선배가 말했다. "여기 10시 출근이야. 그러니까 7시 퇴근해도 돼. 눈치 보지 마." 고마웠다. 진짜 7시에 나갔다. 일주일. 그다음 주. 선배가 물었다. "요즘 7시에 나가?" "네, 괜찮다고 하셔서요." "아, 응. 괜찮아. 근데 다들 8시쯤 나가긴 하거든." 그 뒤로 7시 반에 나간다. 애매한 시간이다. 정시보단 늦고, 팀 평균보단 이르다. 사수는 사수는 8시 반에 나간다. 매일. 비 와도, 눈 와도. 10시 출근이니까 10시간 반 일한다. 한 번 물어봤다. "형, 왜 매일 8시 반이에요?" "응? 그냥. 할 거 하다 보면 그렇게 돼." 할 거. 나도 할 거 많다. 근데 8시 반까지는 못 남는다. 집에 가고 싶다. 여자친구 보고 싶다. 유튜브 보고 싶다. 사수는 미혼이다. 혼자 산다. 집에 가도 할 거 없다고 했다. 그래서 회사에 있는다고. 나는 다르다. 집에 할 거 많다. 빨래, 설거지, 유튜브, 여자친구 전화, 토이 프로젝트. 근데 회사 일이 우선 아닌가.팀장은 팀장은 9시에 나간다. 가끔 10시. 회의 때 말한다. "다들 일찍 퇴근하세요. 워라밸 중요해요." 근데 본인은 9시에 나간다. 모순이다. 아니면 9시가 일찍인가. 한 번 7시에 나가려고 했다. 팀장이 불렀다. "신기획님, 잠깐만요." 순간 식은땀. "네." "이거 내일까지 부탁해요. 급한 거라." "알겠습니다." 그날 8시 반에 나갔다. 급한 거였다. 어쩔 수 없다. 근데 다음 날. 그 자료 회의에서 안 쓰였다. 급한 게 아니었나. 모르겠다. 개발팀은 개발자들은 7시에 나간다. 칼퇴. 눈치 안 본다. 부럽다. 왜 기획자는 못 나가나. 개발자 선배한테 물어봤다. "형들은 왜 칼퇴 가능해요?" "우리? 코드 짜는 게 있으면 내일 하면 되잖아. 머리 아프면 더 오래 걸려." 맞는 말이다. 근데 기획도 마찬가지 아닌가. 머리 아프면 기획도 이상해진다. 차이는 이거다. 개발은 "내일 하면 돼"가 통한다. 기획은 "오늘 해야 돼"가 많다. 왜? 기획이 늦으면 개발이 늦는다. 개발이 늦으면 출시가 늦는다. 그래서 기획은 항상 쫓긴다. 여자친구 말 여자친구는 마케터다. 6시 퇴근. 진짜 6시에 나온다. 통화한다. 7시 반쯤. "오빠 퇴근?" "응, 지금 지하철." "오늘도 야근?" "야근까진 아니고." "7시 반이면 야근이지." 말문 막힌다. 맞다. 7시 반은 야근이다. 30분. 근데 회사에선 야근이 아니다. "거기 왜 그래? 10시 출근인데." "다들 이렇게 있어." "그럼 오빠만 먼저 나오면 안 돼?" "음..." 안 된다는 건 아니다. 근데 안 된다. 왜? 모르겠다. 분위기? 분위기란 분위기는 룰이 아니다. 근데 룰보다 강하다. 회사 공식 퇴근은 7시. 근데 실제 퇴근은 8시. 누가 정한 건 아니다. 그냥 다들 그렇게 한다. 7시에 나가면 뭐라고 하나? 아니다. 아무도 뭐라 안 한다. 그게 더 무섭다. 칼퇴하는 직원한테 뭐라고 하는 회사. 그건 나쁜 회사다. 명확하다. 칼퇴해도 아무 말 없는데, 왠지 눈치 보이는 회사. 이게 더 애매하다. 나쁜 건 아니다. 근데 좋은 것도 아니다. 죄책감의 정체 7시 반에 나간다. 왜 죄책감이 드나. 일을 덜 해서? 아니다. 9시간 반 일했다. 충분하다. 사수가 뭐라고 해서? 아니다. 사수는 "들어가" 했다. 팀 분위기? 이게 맞다. 다들 8시 넘어 나가는데, 나만 7시 반. 이 차이. 30분이다. 겨우 30분. 근데 이 30분이 크다. 30분 더 있으면: 화면 정의서 한 장 더. 회의록 정리. 내일 할 일 미리 보기. 30분 일찍 나오면: 지하철 덜 붐빔. 집에 일찍 도착. 개인 시간 확보. 어느 게 맞나. 모르겠다. 2년 차 선배 2년 차 선배 있다. 나보다 1년 빠르다. 그 선배가 말했다. "나도 1년 차 땐 눈치 봤어. 7시에 못 나갔어." "지금은요?" "지금? 7시 10분에 나가. 딱 10분만 눈치 본다." 웃겼다. 근데 공감됐다. "형, 언제부터 괜찮아졌어요?" "음. 일 잘하면 괜찮아져." 일을 잘하면. 그럼 나는 아직 일을 못하나. 맞다. 사수한테 빨간 줄 받는다. 아직 멀었다. 결국 실력이다. 실력 있으면 7시에 나가도 뭐라 안 한다. 실력 없으면 8시에 나가도 눈치 보인다. 내일은 내일도 7시 반에 나갈 것이다. 모레도. 계속. 언젠간 7시에 나가고 싶다. 떳떳하게. 죄책감 없이. 그러려면 일을 잘해야 한다. 빨간 줄 덜 받아야 한다. 사수한테 "이거 괜찮은데?" 들어야 한다. 그때까지는 7시 반. 애매한 시간. 야근도 아니고, 칼퇴도 아닌. 근데 괜찮다. 1년 차니까. 배우는 중이니까.7시 28분. 가방 챙긴다. 내일도.
- 07 Dec, 2025
SQL 모른다고 했을 때 사수의 표정
그 침묵 "신기획님, 이번 주 사용자 데이터 뽑아서 분석 좀 해줄래요?" 사수가 말했다. 월요일 아침 10시 30분. "네, 알겠습니다." 대답은 했다. 그런데 뭘 어떻게 뽑는 건지 몰랐다. "데이터는 어디 있나요?" "DB에 있죠. SQL로 쿼리 날리면 돼요." 그 순간. "...SQL을 몰라서요." 내 입에서 나왔다. 작은 목소리로. 사수가 멈췄다. 키보드 치던 손을. 모니터 보던 시선을. 호흡까지. 3초 정도였을까. 아니 30초 같았다. "아... 그렇구나." 그게 전부였다. 사수는 다시 모니터를 봤다. 나는 그 침묵이 뭔지 알았다. '기획자인데 SQL을 몰라?' 그 말이었다. 소리 없이 들렸다.그날 오후 점심을 먹고 돌아왔다. 사수가 말했다. "신기획님, 일단 이번 건은 제가 할게요. 시간 나면 SQL 좀 공부해보세요." "네... 죄송합니다." "아니 괜찮아요. 근데 기획자도 기본적인 쿼리는 알아야 해서요." 기본적인. 그 단어가 찔렸다. 나는 2년 차다. 주니어 끝자락. 시니어 입구에서 발만 담근 상태. 그런데 기본을 모른다. 오후 내내 일이 손에 안 잡혔다. 화면 정의서를 켜놨는데 한 줄도 못 썼다. "이 화면에서 이탈률 높은 사용자 데이터 좀..." 개발자가 물어보면 어떡하지. "SQL로 뽑아서..." 그러면 또 어떡하지. 상상만 해도 식은땀이 났다.저녁에 검색했다 퇴근하고 원룸에 들어왔다. 7시 50분. 노트북을 켰다. 'SQL 기초 강의' 검색. 유튜브에 영상이 수백 개 떴다. 1시간짜리, 30분짜리, 10분짜리. "비전공자도 할 수 있는 SQL" "기획자를 위한 SQL 입문" "하루 만에 배우는 SQL" 제목을 보니까 화가 났다. 나한테. 2년 동안 뭐 했나. 왜 이걸 미뤘나. '나중에 배우면 되지' 했다. '개발자가 해주겠지' 했다. '기획자는 기획만 잘하면 되지'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사수의 침묵이 말해줬다. '기본도 모르면서 무슨 기획을 하냐'고. 첫 번째 영상을 틀었다. SELECT 문부터 시작이었다. SELECT * FROM users;이게 뭔지도 몰랐다. 별표가 뭔데. FROM이 뭔데. users가 테이블인 건가. 강의를 20분 들었다. 머리가 아팠다. 집중이 안 됐다. '이걸 다 배워야 하나.' 좌절감이 왔다. 노트북을 덮었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봤다.화요일 아침 출근했다. 사수는 평소처럼 인사했다. "어제 SQL 좀 봤어요?" "네... 조금요." 거짓말이었다. 20분 보다가 접었다. "괜찮아요. 천천히 해도 돼요. 급한 건 아니니까." 그 말이 더 부담이었다. 급하지 않다는 건, 언젠가는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오전 회의가 있었다. 데이터팀장이 말했다. "지난주 사용자 코호트 분석 결과인데요..." 화면에 표가 떴다. 숫자가 가득했다. DAU, WAU, MAU, Retention Rate. 나는 받아적기만 했다. 무슨 말인지 절반도 모르면서. 회의가 끝나고 사수가 말했다. "신기획님, 저 데이터 어떻게 뽑았는지 알아요?" "...SQL이죠?" "맞아요. 코호트 분석은 쿼리가 좀 복잡한데, 기본만 알아도 이해는 할 수 있어요." 이해. 나는 이해도 못 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혼자 먹었다. 편의점 도시락. 책상에서. 노션을 켰다. 'SQL 공부 계획' 페이지를 만들었다.1주차: SELECT 문 익히기 2주차: WHERE 조건절 3주차: JOIN 이해하기 4주차: 집계 함수타이핑하면서 한숨이 나왔다. 4주면 될까. 8주는 아닐까. 그리고 또 생각했다. '이거 배워서 뭐가 달라지지?' 수요일 밤 여자친구한테 말했다. 전화로. "나 SQL 모르는 거 오늘 들켰어." "그게 뭔데?" "데이터 뽑는 거. 기획자는 알아야 하는 건데." "그럼 배우면 되잖아." "...응." 간단하게 말했다. 여자친구는 디자이너다. SQL이 뭔지 모른다. "너 요즘 회사에서 스트레스 많이 받는 것 같아." "아니야. 괜찮아." 거짓말이었다. 매일 받는다. 전화를 끊고 유튜브를 켰다. 어제 본 강의 이어서. WHERE 절을 배웠다. 조건을 걸어서 데이터를 필터링하는 거. SELECT * FROM users WHERE age >= 20;20세 이상 사용자만 뽑는 쿼리. 이건 이해했다. 그런데 또 의문이 들었다. users 테이블은 어디 있지. age 컬럼은 어떻게 알지. DB 구조는 누가 알려주지.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강의는 계속 진행됐다. 나는 멈춰 있었다. 1시간을 봤다. 손으로 따라 쳤다. 메모장에. 뭔가 배운 것 같았다. 그런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정이 넘어서 잤다. 목요일 점심 개발자가 말했다. 밥 먹으면서. "신기획님은 SQL 쓸 줄 알아요?" 갑자기 물었다. 심장이 쿵 했다. "아... 아니요. 지금 배우는 중이에요." "아 그렇구나. 저는 기획자분들이 다 쓸 줄 아는 줄 알았어요." 칼을 꽂았다. 모르고. "보통은... 다들 쓰나요?" "글쎄요. 근데 데이터 보려면 필요하지 않나요?" "맞아요. 그래서 지금 공부 중이에요." "어렵지 않아요. 기본만 알면 돼요." 또 '기본'이었다. 모두가 기본이라고 했다. 나만 모르는 기본. 식판을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밥이 안 넘어갔다. 오후에 사수가 슬랙을 보냈다. "신기획님, 이번 주 신규 가입자 수 좀 확인해주실래요? 어드민 툴에서 볼 수 있어요." 어드민 툴. 다행이었다. SQL은 아니었다. 숫자를 확인했다. 243명. 보고했다. "감사합니다. 혹시 이 중에 20대 비율 알 수 있을까요?" 순간 멈췄다. 어드민 툴에는 전체 숫자만 있었다. 연령대별은 없었다. "...SQL로 봐야 할 것 같은데요." 타이핑하면서 손이 떨렸다. "아 그렇구나. 괜찮아요. 제가 볼게요." 또 사수가 했다. 내가 못 하는 걸. 금요일 오전 주간 회의가 있었다. 대표님도 참석했다. 사수가 발표했다. 이번 주 데이터 리포트. "신규 가입자는 243명입니다. 이 중 20대가 62%를 차지하고요..." 내가 물어봤던 그 숫자였다. 사수가 뽑았던. "좋네요. 20대 타겟팅이 먹히고 있네. 이 추세면 다음 달 목표 달성 가능하겠어요." 대표님이 말했다. 모두가 끄덕였다. 나도 끄덕였다. 그런데 속으로 생각했다. '저 숫자를 나는 못 뽑는다.'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왔다. 모니터를 켰다. 노션에 'SQL 공부 계획' 페이지가 열려 있었다. 일주일 전에 만든. 1주차 목표는 SELECT 문이었다. 체크박스는 비어 있었다. 강의는 20분 봤다. 실습은 안 했다. 따라 치기만 했다. 일주일 동안 뭘 했나. 회피했다. 미뤘다. 바쁘다고 핑계 댔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무서웠다. 못 배울까 봐. 이해 못 할까 봐. '나는 비전공자니까.' 그 말로 자신을 위로했다. 그런데 그게 핑계인 걸 알았다. 비전공자도 배우는 사람은 많다. 나만 안 배우는 거였다. 금요일 저녁 퇴근하고 집에 왔다. 8시. 씻고 나왔다. 배달 음식을 시켰다. 치킨. 노트북을 켰다. 유튜브 대신 구글을 열었다. 'SQL 실습 사이트' 검색. 여러 개가 나왔다. W3Schools, SQLZoo, LeetCode. 첫 번째 사이트를 열었다. 브라우저에서 바로 쿼리를 쳐볼 수 있었다. 샘플 데이터가 있었다. Customers 테이블. 이름, 국가, 나이. SELECT * FROM Customers;실행 버튼을 눌렀다. 결과가 나왔다. 표로. 모든 고객 정보가 떴다. 10명. 다시 쳤다. SELECT * FROM Customers WHERE Country = 'Korea';실행. 한국 고객 3명만 나왔다. 심장이 뛰었다. 조금. 내가 했다. 내가 데이터를 뽑았다. 30분 동안 여러 쿼리를 쳤다.나이가 30 이상인 사람 이름이 'Kim'으로 시작하는 사람 국가별 고객 수 세기틀렸다가 고쳤다. 에러가 났다. 검색했다. 다시 쳤다. 치킨이 식었다. 신경 안 썼다. 자정이 넘어서 노트북을 덮었다. 아직 모르는 게 산더미다. JOIN은 뭔지, 서브쿼리는 뭔지, INDEX는 뭔지. 그런데 오늘은 SELECT와 WHERE를 했다. 내일은 GROUP BY를 해볼 거다. 모레는 COUNT와 SUM을 할 거다. 한 달 뒤에는 사수한테 말할 수 있을까. '제가 뽑아볼게요.' 모르겠다. 그런데 해볼 거다.침묵은 가장 큰 피드백이다. 그 침묵을 잊지 않기로 했다.
- 05 Dec, 2025
비전공 기획자의 CS 지식 콤플렉스
회의실에서 얼어붙는 순간 "이 부분은 캐시 처리로 해결하면 될 것 같은데요." 개발팀장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캐시. 뭔가 빠르게 하는 거다. 그 정도는 안다. 하지만 정확히 뭔지는 모른다. 노트북 화면에 '캐시 처리 검토' 라고 적었다. 손에 땀이 났다. "기획자님 생각은요?" 팀장이 나를 봤다. 심장이 빨라졌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좋을 것 같다니. 나도 내가 한심했다. 회의가 끝났다. 화장실에 가서 '캐시란' 검색했다. 임시 저장소. 빠른 접근. 그래, 이거였구나. 2년차인데 아직도 이런다.몰래 검색하는 일상 오전 10시 30분. 데일리 스크럼. "API 응답 시간이 너무 길어서요." 개발자가 말했다. 나는 노션 창 뒤에서 구글을 켰다. 'API란 무엇인가' 검색창에 친다. 백엔드 개발자가 계속 말하고 있다. 나는 검색 결과를 빠르게 훑었다. 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 프로그램 간 소통 방식. 아, 그러니까 우리 앱이 서버한테 데이터 달라고 하는 거구나. "기획 쪽에서 확인할 부분 있나요?" 나를 봤다. "아... 로딩 화면 추가하는 건 어떨까요?" "그것도 방법이긴 한데, 근본적 해결은 아니죠." 맞다. 근본적 해결이 아니다. 나는 또 땜질 기획을 했다. 회의가 끝나고 자리에 앉았다. 노션에 용어 정리 페이지를 만들었다.API: 프로그램 간 소통 창구 캐시: 임시 저장소, 빠른 접근용 세션: 사용자 접속 정보 유지이렇게 모아놓은 게 벌써 50개다. 근데 모아만 놓고 제대로 이해한 건지 모르겠다.들킬까봐 무서운 순간들 가장 무서운 건 개발자가 내 기획서를 볼 때다. "이 부분, 세션 만료되면 어떻게 처리할 거예요?" 세션 만료. 로그인 풀리는 거 아닌가. "로그인 화면으로 보내면 될 것 같은데요." "그럼 작성하던 내용은요?" "아..." 생각 못 했다. 또 구멍이 났다. "로컬 스토리지에 임시 저장하면 되겠네요. 제가 정리해서 공유할게요." 개발자가 말했다. 고맙다. 그런데 창피했다. 로컬 스토리지. 또 모르는 용어다. 사수가 말했다. "비전공이라 힘들지?" 솔직하게 말했다. "네... 용어가 너무 어렵습니다." "나도 처음엔 그랬어. 근데 기획자가 다 알 필요는 없어. 물어보면 돼." 물어보면 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매번 물어보면 무능해 보일 것 같다. 신입 때는 몰라도 됐다. 2년차인데 아직도 모르면 문제 아닌가. 검색창에 '로컬 스토리지'를 쳤다. 브라우저 저장소. 세션 스토리지보다 오래 유지. 그럼 세션 스토리지는 또 뭔데. 끝이 없다.비전공의 생존법 유튜브에 'CS 기초' 강의가 500개는 된다. 북마크만 300개다. 본 건 10개. 주말마다 공부하려고 했다. 근데 주말엔 친구를 만나고 여자친구를 만나고 밀린 빨래를 했다. 그러다 월요일이 온다. "Redis 캐싱 적용하면 어떨까요?" Redis. 또 새로운 단어다. 점심시간. 사수한테 물어봤다. "형, Redis가 정확히 뭔가요?" "캐시 저장소야. 메모리 기반이라 빠르지." "메모리 기반이요?" "RAM에 저장한다는 거. DB는 디스크에 저장하잖아." RAM, 디스크.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거 언제 다 배워요?" "배우는 게 아니라 부딪치면서 익히는 거지. 나도 아직 모르는 거 많아." 사수도 모르는 게 많다고 했다. 조금 위안이 됐다. 그날 저녁. 'Redis 입문' 영상을 켰다. 20분짜리였다. 10분 보다가 졸았다. 이게 맞나 싶다. 알은 척하는 기술 회의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했다. 첫째, 모르는 용어 나오면 받아적는다. 둘째, "확인해보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셋째, 회의 끝나고 검색한다. 넷째, 다음 회의 전에 그 용어 들어간 문장을 한 번 말해본다. "API 응답 속도 개선안을 정리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반만 안다. 동기한테 물어봤다. "너도 그래?" "나도 그러지. 근데 1년 전보다는 나아졌어." "언제쯤 당당해질까?" "글쎄. 5년차 선배도 가끔 모른다고 하던데." 그래도 선배는 모른다고 말할 용기가 있다. 나는 아직 그게 무섭다. "이거 무슨 뜻이에요?" 이 한 마디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성장하는 중이라고 믿고 싶다 어제 기획서를 썼다. 개발자가 피드백을 줬다. "이 부분 API 설계 고려해주셨네요. 좋습니다." 칭찬이었다. 작은 거지만 기뻤다. 지난주에 배운 REST API 개념을 적용한 거였다. GET, POST, DELETE. 이 정도는 이제 안다.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6개월 전보다는 안다. 노션 용어집을 다시 봤다. 50개가 100개가 됐다.API: 프로그램 간 소통 창구, REST 방식이 일반적 캐시: 임시 저장소, Redis 같은 인메모리 DB 사용 세션: 로그인 상태 유지, 만료 시간 있음 로컬 스토리지: 브라우저 저장소, 영구 보관 쿠키: 브라우저 저장 데이터, 용량 작음예전엔 단어만 적었다. 이젠 설명이 붙는다. 완벽하지 않다. 깊이는 부족하다. 그래도 전보다는 낫다. 사수가 말했다. "CS 지식은 기획자한테 필수는 아니야. 근데 있으면 편하지." 맞다. 필수는 아니다. 그런데 없으면 불안하다. 개발자와 대화할 때, 뭔가 막힌다. 벽이 있는 느낌이다. 그 벽을 넘고 싶다. 천천히라도. 2년차의 솔직한 고백 아직도 모르는 게 더 많다. 도커가 뭔지, 쿠버네티스가 뭔지, CI/CD가 뭔지. 개발자들이 하는 말의 절반은 못 알아듣는다. 그래도 작년보다는 낫다. 작년엔 80%를 몰랐다. 지금은 50%. 천천히 줄어들고 있다. 언젠가는 당당하게 "이거 모르겠는데 설명해주세요"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개발자가 설명할 때 바로 이해할 수 있을까. 2년차는 아직 그런 날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는 않는다. 오늘도 유튜브 강의 하나를 북마크했다. 볼지는 모르겠지만.비전공 기획자의 CS 공부는 끝이 없다. 그래도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더 안다. 그걸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