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와의 대화가 항상 끝나는 방식: '확인해보겠습니다'

개발자와의 대화가 항상 끝나는 방식: '확인해보겠습니다'

또 말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오늘도 이 말로 끝났다. 개발자 민준 선배가 물었다. "이 부분 API 호출 몇 번 일어나는 거예요?" 나는 3초 멍때렸다. 그리고 말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회의실 나왔다. 복도에서 한숨 쉬었다. 3번째다. 오늘만.패턴이 보인다 아침 회의. "이거 로딩 시간 얼마 걸려요?" → "확인해보겠습니다." 오후 슬랙. "페이지네이션 몇 개 단위로?" → "확인해보겠습니다." 저녁 코드리뷰. "이 로직 왜 이렇게 짰어요?" → "확인해... 아니다, 이건 내가 짠 게 아니라서." 마지막 건 다행이다. 확인해보겠습니다 안 했다. 노션에 받은 질문 정리했다. 오늘 것만 7개. 이번 주 누적 23개. "확인해보겠습니다" 18번. 실제로 확인한 것 11개. 아직 못한 것 7개. 내일 확인해야 한다. 왜 현장에서 못 하나 이유는 안다. 모르기 때문이다. 민준 선배가 "API 호출 몇 번"이라고 물었을 때, 내 머릿속은 이랬다. 'API가 뭐더라. 아, 서버랑 주고받는 거. 근데 몇 번? 화면에 데이터 뜨는 게 몇 번인가? 아니면 사용자가 클릭할 때마다? 잠깐, 이거 무한스크롤인데 스크롤 내릴 때마다? 근데 캐싱하면 또 다른가?' 5초 지났다. 입을 열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안전하다. 틀린 말을 안 했다.사수는 다르다 지수 선배는 다르게 답한다. 개발자: "이거 API 몇 번이에요?" 지수 선배: "지금 기획은 5번인데, 퍼포먼스 이슈 있으면 배치로 묶을게요. 어느 정도까지 괜찮아요?" 개발자: "음... 10번까진 괜찮은데." 지수 선배: "그럼 지금 구조 ㄱㄱ요." 끝이다. 30초. 나는 같은 질문에 3시간 쓴다. 노션 뒤지고, 슬랙 검색하고, 기획서 다시 읽고. 그리고 답한다. "5번입니다. 괜찮을까요?" 개발자가 답한다. "10번까진 ㄱㄱ." 나는 또 쓴다. "네 감사합니다!" 3시간과 30초. 차이는 지식이다. 내가 모르는 것들 리스트를 만들었다. 개발자 질문에 못 답한 이유들.API 호출 횟수 - 기획서에 안 썼음 로딩 시간 - 측정 안 해봤음 페이지네이션 단위 - 안 정했음 에러 케이스 - 생각 못 함 권한 처리 - 빠뜨림 데이터 정합성 - 이게 뭔지 모름 트랜잭션 - 이것도 모름솔직히 4번부터는 단어가 어렵다. 지수 선배한테 물어봤다. "선배, 저 개발 공부 해야 할까요?" 선배가 웃었다. "공부는 무슨. 일하면서 배우는 거지." "근데 저 맨날 확인해보겠습니다만 해요." "응, 나도 주니어 때 그랬어. 2년 했나?" 2년. 나는 이제 6개월.협상은 지식에서 나온다 민준 선배가 말했다. "이거 구현 2주 걸려요." 지수 선배가 답했다. "이 기능 빼면 1주 되나요?" 민준 선배: "그것도 1.5주..." 지수 선배: "그럼 이 부분 1차 때 빼고, 2차 때 넣죠. 1주 컷?" 민준 선배: "오케이." 협상 끝. 나였으면 어땠을까. 민준 선배: "2주 걸려요." 나: "네... 2주요? 좀 길지 않나요...?" 민준 선배: "그럼 직접 짜실래요?" 나: "...확인해보겠습니다." 차이가 뭔가. 지수 선배는 안다. 어떤 기능이 무겁고, 뭘 빼면 가벼워지는지. 나는 모른다. 기획서에 다 필요해 보인다. 지식 없이는 협상할 수 없다. 협상은 대안 제시다. 대안은 구조 이해에서 나온다. 나는 구조를 모른다. 공부하기 시작했다 유튜브 봤다. "API란 무엇인가" 영상. 12분. 절반 이해했다. 노마드코더 무료 강의 들었다. HTML, CSS. 3시간. 웹페이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았다. 민준 선배한테 물었다. "선배, 페이지네이션 몇 개씩 하는 게 좋아요?" "보통 20개? 근데 데이터 무거우면 10개." "무겁다는 게 뭐예요?" "이미지 많거나, 텍스트 길거나." 아. 이런 거구나. 다음 회의 때 물었다. "이 리스트 이미지 많은데, 10개씩 할까요?" 민준 선배가 놀랐다. "오, 좋은데요?" 확인해보겠습니다를 안 했다. 첫 번째 성공. 아직도 많이 모른다 여전히 못 답하는 질문이 많다. "이거 동시성 제어 어떻게 해요?" - 동시성이 뭔지 모른다. "락 걸어야 하나요?" - 락이 뭔지 모른다. "트랜잭션 단위 어떻게?" - 여전히 모른다. 검색했다. 어렵다. 나중에 공부한다. 지금은 할 수 있는 것부터. API 몇 번, 페이지네이션 몇 개, 로딩 시간 얼마. 이것만 답해도 확인해보겠습니다가 줄어든다. 이번 주 목표. 확인해보겠습니다 10번 이하. 지난주 18번. 8번 줄이기. 선배의 조언 지수 선배가 말했다. "너 요즘 질문 잘하더라." "아직도 많이 못해요." "아니, 예전엔 그냥 끄덕였잖아. 지금은 '이게 이런 건가요?' 물어봐." 맞다. 변했다. 회의 때 멍때리지 않는다. 모르는 단어 나오면 바로 손 든다. "죄송한데, 그게 뭐예요?" 처음엔 쪽팔렸다. 지금은 괜찮다. 모르는 걸 아는 게 더 쪽팔리다. "그리고 개발자들이 싫어하는 거 있어." "뭐요?" "나중에 확인해놓고 답 안 하는 거. 확인해보겠습니다 했으면 꼭 답해." 아. 7개 밀려있다. 오늘 다 답한다. 변화는 작다 극적인 성장은 없다. 갑자기 협상 귀재 된 거 아니다. 그냥 조금씩. 어제 못 답한 질문, 오늘은 답한다. 오늘 검색한 단어, 내일은 쓴다. 이번 주 회의록 봤다. "확인해보겠습니다" 12번. 목표 10번인데 2번 초과. 그래도 지난주보단 6번 줄었다. 다음 주 목표 8번. 한 달 뒤 5번. 언젠간 0번. 0번 되면 뭐라고 할까. 아마 이럴 것 같다. 개발자: "API 몇 번이에요?" 나: "지금 3번인데, 몇 번까지 ㄱㄱ인가요?" 개발자: "5번까진." 나: "오키." 상상만 해도 기분 좋다. 오늘도 확인한다 퇴근 전 노션 열었다. 밀린 질문 7개.페이지네이션 - 답변 완료 로딩 시간 - 개발 완료 후 측정 예정이라고 답함 에러 메시지 - 케이스별로 정리해서 공유 권한 처리 - 사수한테 물어봐서 답함 API 호출 - 플로우차트 그려서 공유 데이터 형식 - 샘플 만들어서 전달 일정 - 다시 조율해서 회신7개 다 했다. 민준 선배한테 슬랙 보냈다. "밀린 답변 다 드렸습니다." 읽음 떴다. 좋아요 눌렀다. 내일 또 질문 올 것이다. 또 모를 것이다. 또 확인할 것이다. 하지만 조금씩 줄어든다. 확인해보겠습니다가.6개월 차 기획자의 성장은 느리다. 하지만 매일 조금씩 단어를 배운다. 그게 쌓이면 언젠간 협상이 된다. 오늘도 확인한다. 내일은 덜 확인한다.

기획서 검토받은 날 밤, 해야 할 수정이 30개

기획서 검토받은 날 밤, 해야 할 수정이 30개

오후 6시 20분, 알림 노션 알림이 떴다. "@신기획님 - 31개 코멘트" 사수가 검토를 끝낸 거다. 31개. 숫자를 다시 봤다. 31개 맞다. 기획서 페이지를 열었다. 빨간 말풍선이 줄줄이 달려 있다. 스크롤을 내려도 끝이 안 보인다. "이 부분 근거 추가 부탁드려요" "여기 플로우 다시 그려주세요" "이건 개발팀이랑 확인 필요합니다" 한 줄 한 줄 읽었다. 손이 차가워졌다.퇴근 후 계산 7시 반에 나왔다. 집 가는 지하철 안에서 노션을 다시 켰다. 코멘트를 카테고리별로 정리해봤다.단순 수정: 12개 (문구, 오타, 서식) 내용 보완: 9개 (근거, 데이터, 사례) 구조 변경: 6개 (화면 플로우, 정책) 확인 필요: 4개 (개발팀, 디자인팀)단순 수정은 30분이면 된다. 내용 보완은... 자료 찾는 시간까지 3시간? 구조 변경은 다시 그려야 한다. 2시간. 확인은 내일 아침에 물어봐야 한다. 총 5시간 30분. 집에 도착했다. 밤 9시. 씻고 밥 먹으면 10시. 내일 아침 10시 출근. 자야 한다. 근데 내일 오전에 회의가 두 개 있다. 오후에는 다른 기획서 초안 마감이다. 결국 오늘 밤에 해야 한다.밤 11시, 노션 앞 샤워하고 나왔다. 커피를 내렸다. 책상에 앉았다. 노션을 켰다. 31개 코멘트가 그대로 있다. 당연하다. 첫 번째 코멘트부터 시작했다. "배경 부분에 시장 규모 데이터 추가해주세요" 구글에 검색했다. "국내 OO 시장 규모" 나온 자료가 2021년 거다. 최신 자료를 찾았다. 리포트를 다운받았다. 4페이지까지 읽고 숫자를 복사했다. 15분 걸렸다. 첫 번째 완료. 30개 남았다.새벽 1시, 18개 완료 절반 넘게 했다. 등이 아프다. 단순 수정은 다 끝났다. 문구 고치고, 오타 고치고, 띄어쓰기 맞추고. 이건 쉬웠다. 내용 보완도 6개 완료했다. 근거 찾아서 붙이고. 참고 링크 달고. 출처 표기하고. 남은 건 어려운 것들이다. 화면 플로우 다시 그리기. 정책 로직 수정. 개발 공수 재확인. 머리가 안 돌아간다. 커피를 한 잔 더 내렸다. 사수 코멘트를 다시 읽었다. "이 플로우는 사용자가 헷갈릴 것 같아요. A→B→C 순서를 B→A→C로 바꾸면 어떨까요?" 맞는 말이다. 근데 이미 그린 화면이 8개다. 다시 그리면 번호를 다 바꿔야 한다. 설명도 다 고쳐야 한다. 한숨 나왔다. 근데 해야 한다. 새벽 2시 40분, 25개 완료 화면은 다 고쳤다. 번호 바꾸고. 설명 순서 바꾸고. 화살표 다시 그렸다. 정책 로직도 수정했다. "케이스 A일 때 예외처리 추가 필요" 표를 하나 더 만들었다. 조건과 결과를 정리했다. 남은 게 6개다. 근데 이 6개가 문제다. "개발팀 검토 후 공수 확인 부탁드려요" "디자인 가이드랑 맞는지 확인해주세요" "운영팀 의견 받아보면 좋을 것 같아요" 이건 내일 아침에 물어봐야 한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없다. 25개 완료. 6개 대기. 저장하고 노션을 닫았다. 다음날 아침 10시에 출근했다. 눈이 퉁퉁 부었다. 사수한테 메시지 보냈다. "어제 코멘트 25개 반영했습니다. 6개는 확인 후 반영하겠습니다." 답장이 왔다. "고생했어요. 확인해볼게요." 오전 회의 두 개를 버텼다. 점심 먹고 개발팀한테 물어봤다. "이 기능 공수 어느 정도 나올까요?" "음... 3일 정도?" 노션에 적었다. "개발 공수: 약 3일 (백엔드 2일, 프론트 1일)" 디자인팀한테도 물어봤다. "이 버튼 위치 가이드랑 맞나요?" "여기는 오른쪽 정렬이 맞아요." 또 고쳤다. 오후 4시. 31개 완료. 사수한테 멘션 달았다. "전체 반영 완료했습니다. 재검토 부탁드립니다." 답장은 저녁에 왔다. "확인했어요. 많이 좋아졌네요. 고생했어요." 많이 좋아졌다. 완벽하다는 말은 아니다. 또 코멘트 달릴 수도 있다. 근데 괜찮다. 어제보단 나아졌다.31개 코멘트, 밤새서 25개 고치고, 다음날 6개 마저 끝냈다. 사수가 "좋아졌다"고 했다. 오늘 밤은 일찍 잔다.

인턴 기획자였던 나, 2년차에서 멈춘 느낌

인턴 기획자였던 나, 2년차에서 멈춘 느낌

인턴 기획자였던 나, 2년차에서 멈춘 느낌 1년차는 달랐다 입사 첫날을 기억한다. 사수가 건넨 기획서를 열었다. 아무것도 몰랐다. "와이어프레임", "유저플로우", "MVP". 단어 하나하나가 외계어였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매일 배울 게 있었다. 사수 기획서를 복사해서 내 노션에 붙여놓고 구조를 분석했다. "아, 이렇게 페이지를 나누는구나." "요구사항을 이런 식으로 정리하네." 3개월 차에는 간단한 화면 정의서를 혼자 썼다. 사수가 "잘했어"라고 했다. 그날 저녁 여자친구한테 자랑했다. "나 오늘 칭찬받았어." 6개월 차. 회의에서 처음으로 의견을 냈다. "이 버튼 위치, 사용자 동선상 여기가 나을 것 같습니다." 떨렸지만 말했다. 개발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낫겠네요."9개월 차에는 작은 기능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기획했다. 요구사항 정리부터 화면 정의서, 개발 QA까지. 내가 기획한 게 실제 서비스에 들어갔다. 앱을 켜서 그 화면을 봤다. 뿌듯했다. 1년 차 연말. 연봉 재계약 면담에서 대표가 말했다. "많이 성장했어요. 내년에도 잘 부탁합니다." 집에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맥주를 샀다. 혼자 마시면서 생각했다. "나 잘하고 있네." 그때는 몰랐다. 이게 끝이라는 걸. 2년차부터 뭔가 이상했다 2년 차 3개월. 오늘도 화면 정의서를 쓴다. 1년 전에 쓴 것과 똑같은 구조다. 로그인 화면, 회원가입 화면, 메인 화면. 버튼 위치만 조금 다르다. 사수가 말한다. "이번엔 결제 플로우 기획해봐." 지난번에 했던 거랑 거의 같다. 템플릿 복사해서 내용만 바꿨다. 2시간 걸렸다. 1년 전 같으면 이틀은 걸렸을 일이다. "빨라졌네"라고 생각했다. 근데 왜 기분이 안 좋을까. 회의 시간. PM이 묻는다. "이 기능, 어떻게 생각해?" 1년 전 같으면 떨면서 대답했을 텐데. 지금은 그냥 나온다. "UI는 기존 패턴 따라가고요, 개발 공수 고려하면 이렇게 하는 게 낫습니다." 정답이다.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내 입에서 나온 말인데 내가 놀라지 않는다. 1년 전에 사수가 하던 말이다. 내가 따라한 거다.저녁. 노션 정리하다가 1년 전 내가 쓴 글을 봤다. "오늘 처음으로 API 명세서를 이해했다. 어렵지만 재밌다." 지금은? API 명세서 보면 그냥 안다. 어떻게 동작할지, 어디서 막힐지. 근데 재밌지 않다. 내가 한계에 도달한 건가 주말. 여자친구가 묻는다. "요즘 힘들어 보여."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힘든 건 아니다. 야근도 별로 없고, 사수도 잘해준다. 그냥 멈춘 느낌이다. 토이 프로젝트 기획서를 켰다. 2주째 첫 페이지에서 못 나가고 있다. "뭘 기획하지?" 아이디어가 안 난다. 1년 전에는 아이디어가 넘쳤는데. 아니다. 정확히는 아이디어가 나오다가 지워진다.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이미 있는 서비스인데." "이렇게 하면 개발이 너무 오래 걸릴 텐데." 머릿속에서 사수 목소리가 들린다. "현실적으로 생각해야지." 맞는 말이다. 근데 이게 맞나. 링크드인을 켰다. 같이 입사한 동기가 글을 올렸다. "새로운 프로젝트 런칭했습니다!" 사진에 그가 웃고 있다. 팀원들과 함께. 나는? 오늘 뭐 했지. 화면 정의서 3개 썼다. 다 비슷한 내용이다. 선배들한테 물어봤다 용기 내서 사수한테 물었다. "저 요즘 성장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사수가 웃는다. "다들 그래. 2년차 때 한 번씩 겪어." 그리고 말한다. "근데 지금이 중요해. 기초를 다지는 시기거든." 기초? 1년 동안 다진 거 아닌가. 더 다져야 하나. 다른 팀 선배한테도 물었다. 5년차 기획자다. "저도 그랬어요. 근데 3년차 되니까 또 달라지더라고요." 3년차? 1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건가. 퇴근길에 유튜브를 봤다. "주니어 기획자 성장 로드맵" 영상이다. 댓글을 읽었다. "저도 2년차인데 공감돼요." "3년차도 마찬가지입니다." "5년차인데 아직도..." 아, 다들 그렇구나. 근데 위로가 안 된다.반복이 나쁜 건 아니다 어제 회사에서 큰 버그가 났다. 결제 기능이 멈췄다. 개발팀이 난리다. PM이 회의실로 불렀다. "원인 파악하고 대응 방안 기획해줘." 1년 전 같으면 패닉했을 것이다. 근데 지금은 알고 있다. 뭘 해야 하는지. 30분 만에 문서를 만들었다. 버그 발생 시나리오, 영향 범위, 임시 조치, 근본 해결 방안. 개발팀장이 말한다. "역시 신기획씨는 빨라." 그날 저녁 생각했다. 내가 빨라진 이유는? 반복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상황을 여러 번 겪었기 때문이다. 반복이 나쁜 건 아니구나. 문제는 반복만 하고 있다는 거다. 같은 레벨의 일만 계속한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 1년 전에 배운 걸 2년째 쓰고 있다. 새로 배운 건? 딱히 없다. 정체기가 아니라 안전지대였다 주말에 도서관에 갔다. 기획 책을 빌렸다. 『린 스타트업』, 『인스파이어드』. 1년 전에 샀다가 반만 읽고 덮은 책들이다. 다시 펼쳤다. 이번엔 다르게 읽혔다. "아, 우리 회사에서 이거 안 하고 있네." "이 방법론, 우리한테 필요한데." 근데 회사에서 제안할 수 있을까? 사수가 "그건 너무 이상적이야"라고 하면? PM이 "시간 없어"라고 하면? 결국 안 한다. 책을 덮는다. "나중에 해야지." 1년 전에도 그렇게 말했다. 월요일 아침. 출근해서 노션을 켰다. 할 일 리스트가 똑같다. "화면 정의서 작성", "회의록 정리", "개발 QA". 손이 알아서 움직인다. 클릭, 타이핑, 저장. 2시간 만에 끝났다. 효율적이다. 근데 이게 성장인가? 깨달았다. 나는 정체기에 있는 게 아니다. 안전지대에 있는 거다. 실수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사수한테 혼나지 않는 선에서. 편하게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있다. 작은 불편함을 선택하기 화요일. 회의에서 PM이 물었다. "이 기능, 어떻게 할까?" 평소 같으면 안전한 답을 했을 것이다. "기존 방식대로 하는 게 낫습니다." 근데 이번엔 다르게 말했다.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보면 어떨까요?" 떨렸다. PM이 묻는다. "어떤 방식?" 준비한 게 없었다. 주말에 본 책 내용을 떠올렸다. "A/B 테스트를 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두 가지 버전을 만들어서 사용자 반응을 보는 거죠." 개발자가 말한다. "공수가 두 배 드는데요." 예상한 반응이다. 근데 물러서지 않았다. "초기 공수는 들지만, 데이터 기반으로 결정할 수 있잖아요. 나중에 다시 뒤집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요?" 팀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한번 해보자." 회의가 끝났다. 심장이 뛴다. 1년 만이다. 이런 느낌. 퇴근 후 집에 와서 A/B 테스트 방법론을 공부했다. 모르는 게 많다. 어렵다. 근데 재밌다. 이거다. 이 느낌. 1년 전에 느꼈던 거. 멈춘 게 아니라 쉬고 있었던 거다 목요일. A/B 테스트 기획안을 만들었다. 처음 하는 거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3일 동안 매일 야근했다. 사수한테 보여줬다. 피드백이 많이 나왔다. "이 부분은 측정이 어려울 것 같은데." "여기는 좀 더 구체적으로 써야 해." 1년 전 같으면 기죽었을 것이다. 근데 지금은 다르다. "알겠습니다. 수정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수정했다. 금요일. 수정한 기획안을 다시 보여줬다. 사수가 말한다. "많이 좋아졌네.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아." 개발팀 회의. 내가 발표했다. "이번 기능은 A/B 테스트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화면을 넘기면서 설명했다. 개발자들이 질문한다. 대답한다. 모르는 건 "확인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한다. 회의 후 개발팀장이 말했다. "신기획씨, 요즘 달라진 것 같아요." 뭐가 달라졌을까. 내가 봐도 모르겠다. 주말. 여자친구가 말한다. "요즘 표정이 좋아졌어." 그래? "응, 한동안 우울해 보이더니." 그날 밤 일기를 썼다. "2년차에서 멈춘 줄 알았다. 근데 멈춘 게 아니었다. 쉬고 있었던 거다. 다음 단계로 가기 전에." 2년차는 끝이 아니다 월요일 아침. 출근했다. 할 일 리스트를 봤다. "A/B 테스트 결과 분석", "다음 실험 설계". 새로운 일이다. 어렵다. 모르는 게 많다. SQL 공부해야 한다. 통계도 봐야 한다. 근데 겁나지 않는다. 1년 전에도 다 몰랐다. 그래도 배웠다. 이번에도 배우면 된다. 사수가 말한다. "신기획씨, 이번 분기 목표 얘기 좀 하자." 면담실로 갔다. 사수가 묻는다. "어떤 걸 배우고 싶어?" 1년 전 같으면 "시키는 거 하겠습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근데 이번엔 준비했다. "데이터 분석 공부하고 싶어요. 그리고 실험 설계 방법론도요." 사수가 웃는다. "좋아. 지원해줄게." 퇴근길. 지하철에서 링크드인을 켰다. 동기가 또 글을 올렸다. 부럽지 않았다. 나도 내 속도로 가고 있으니까. 집에 와서 노트북을 켰다. SQL 강의를 재생했다. 어렵다. 근데 할 만하다. 2년 차는 끝이 아니었다. 중간 지점이었다. 1년 동안 배운 걸 내 것으로 만드는 시기. 그리고 다음을 준비하는 시기. 멈춘 게 아니라 숨을 고르고 있었던 거다. 다음 언덕을 오르기 전에.2년차 정체기는 끝이 아니라 쉼표였다. 이제 다음 문장을 쓸 시간이다.

회의 때 받아적기만 2시간, 그 다음엔?

회의 때 받아적기만 2시간, 그 다음엔?

10시, 첫 번째 회의 10시 회의실 들어갔다. 주간 기획 리뷰. 사수가 화면 공유했다. 나는 노션 켰다. 새 페이지 만들고 날짜 적었다. "2025년 1월 X일 주간 기획 리뷰." 대표님이 말했다. "지난주 랜딩페이지 전환율 0.8%야. 왜 이래?" 타이핑 시작했다.랜딩페이지 전환율 0.8% 대표님: 왜 이래?개발팀장이 말했다. "CTA 버튼이 너무 아래 있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타이핑.개발팀장: CTA 버튼 위치 문제?디자이너가 말했다. "근데 UX 리서치 결과는 지금 위치가 맞다고 나왔는데요." 타이핑.디자이너: UX 리서치 결과는 현재 위치 OK대표님이 말했다. "그럼 다른 문제겠네. 신기획씨, 경쟁사 분석해봐요." 타이핑.나: 경쟁사 분석30분 동안 받아적었다. 말이 빠르면 뒷부분을 놓쳤다. 그럼 '...' 찍고 넘어갔다. 회의 끝났다. 노션 페이지 봤다. 불렛 포인트 17개. 이게 뭐지.11시, 두 번째 회의 11시 기능 기획 논의. 사수가 말했다. "오늘은 알림 기능 어떻게 할지 정해야 해요." 또 타이핑 시작.주제: 알림 기능개발자A가 말했다. "푸시 알림이요? 인앱 알림이요?" 사수: "둘 다요." 개발자B가 말했다. "그럼 FCM 써야 하는데, 토큰 관리는 누가 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일단 받아적었다.FCM 사용 토큰 관리? (누가)개발자A: "알림 종류가 몇 개예요?" 사수: "일단 5개? 결제 완료, 배송 시작, 배송 완료, 이벤트, 공지." 타이핑.알림 종류 5개 결제 완료 배송 시작 배송 완료 이벤트 공지개발자B: "각각 우선순위는요?" 사수가 나를 봤다. "신기획씨, 이거 정리해서 우선순위 표 만들어줘요." "네, 알겠습니다." 타이핑.나: 알림 우선순위 표 작성40분 회의 끝났다. 노션 봤다. 불렛 포인트 23개. 이게... 회의록인가? 11시 50분, 세 번째 회의 점심 먹기 10분 전. 긴급 회의 잡혔다. 마케팅팀 요청. "다음 주 이벤트 페이지 급해요." 대표님: "뭐가 급한데?" 마케팅팀장: "광고 집행 날짜가 정해졌어요. 5일 남았어요." 사수가 나를 봤다. "신기획씨, 받아적어요." 타이핑.이벤트 페이지 광고 집행: 5일 후 긴급마케팅: "이벤트 제목은 '새해맞이 특별 할인'이고요, 쿠폰 3종류 노출해야 해요." 타이핑.제목: 새해맞이 특별 할인 쿠폰 3종류디자이너: "레퍼런스 있어요?" 마케팅: "이거요." (링크 공유) 링크 복사해서 노션에 붙였다. 개발자: "5일 안에 개발 못 해요." 마케팅: "그럼 어떡해요?" 대표님: "기존 템플릿 쓰면 되지 않아요?" 사수: "템플릿 A가 제일 비슷한데, 수정 범위가..." 20분 동안 말이 오갔다. 타이핑 속도 최대치. 회의 끝났다. 12시 10분. 점심시간 지났다. 노션 페이지 3개. 불렛 포인트 63개. 배고픈데 이걸 어떻게 정리하지.오후 2시, 정리 시작 김밥 먹으면서 노션 봤다. 불렛 포인트 지옥. 사수한테 물어봤다. "회의록 양식 있나요?" 사수가 링크 줬다. "이거 참고해서 정리해봐요." 양식 열었다.회의 일시/참석자 안건 논의 내용 결정 사항 액션 아이템 (담당자/기한)아, 이렇게 나눠야 하는구나. 첫 번째 회의부터 다시 봤다. 받아적은 거 읽었다. "랜딩페이지 전환율 0.8%, 대표님: 왜 이래?, 개발팀장: CTA 버튼 위치 문제?..." 이게 논의 내용인가, 결정 사항인가. 모르겠다. 일단 그대로 옮겼다. 논의 내용:랜딩페이지 전환율 0.8% (낮음) CTA 버튼 위치 문제 제기 (개발팀장) UX 리서치 결과는 현재 위치 OK (디자이너)결정 사항:...?결정된 게 뭐였지. 경쟁사 분석하기로 했나? 그게 결정 사항인가? 액션 아이템:신기획: 경쟁사 분석 (기한: ?)기한을 안 정했다. 언제까지 하는 거지. 사수한테 슬랙 보냈다. "경쟁사 분석 언제까지 드리면 될까요?" 답장 왔다. "이번 주 금요일까지요." 수정했다.신기획: 경쟁사 분석 (기한: 1/10 금)첫 번째 회의 정리 끝. 30분 걸렸다. 두 번째, 세 번째 남았다. 오후 4시, 이게 맞나 두 번째 회의 정리하는데 머리 아프다. "FCM 사용, 토큰 관리? (누가)" 이게 논의 내용인가. 근데 결론이 뭐였지. 누가 토큰 관리하기로 했나. 회의록 다시 읽었다. 안 나와 있다. 슬랙에 개발자한테 물어봤다. "토큰 관리 누가 하기로 했나요?" 답: "우리가 하죠 뭐." 그럼 그렇다고 회의 때 말해주지. 결정 사항:FCM 사용 토큰 관리: 개발팀액션 아이템:신기획: 알림 우선순위 표 작성 (기한: ?)또 기한이 없다. 사수한테 물었다. "이번 주요." 금요일인가, 목요일인가. "목요일까지요." 수정.신기획: 알림 우선순위 표 (기한: 1/9 목)알림 우선순위 표를 어떻게 만드는지 모른다. 나중에 검색해야지. 두 번째 정리 끝. 또 30분. 세 번째 회의. 이벤트 페이지. 받아적은 거 봤다. "긴급, 5일 후, 쿠폰 3종류, 템플릿 A..." 논의만 20분인데 결정은 뭐였지. 회의록 끝까지 읽었다. 아, 맞다. 템플릿 A 쓰고, 수정 범위는 내일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결정 사항:템플릿 A 사용 수정 범위는 내일 회의에서 확정액션 아이템:없음? 아니면 나?사수한테 물었다. "이벤트 페이지 제가 뭐 해야 하나요?" 답: "일단 템플릿 A 열어서 어떤 부분 수정 가능한지 보고, 내일 회의 때 공유해요." 액션 아이템:신기획: 템플릿 A 수정 가능 범위 검토 (기한: 내일 회의 전)세 번째 끝. 5시 반. 회의록 3개 완성. 2시간 반 걸렸다.저녁 7시, 검토받기 사수한테 공유했다. "회의록 작성했습니다." 10분 뒤 답장. "확인했어요. 피드백 남겼어요." 노션 열었다. 댓글 6개. 첫 번째 회의: "경쟁사 분석 범위를 구체적으로 적어주세요. 어떤 페이지? 몇 개 업체?" 두 번째 회의: "알림 5개 종류 말고, 각 알림의 발송 조건도 정리 필요해요." 세 번째 회의: "템플릿 A 검토할 때 체크리스트 만들어서 같이 공유해주세요." 댓글 읽었다. 할 일이 늘었다. 경쟁사 분석 범위. 회의 때 안 나왔는데. 사수한테 물어야 하나, 내가 정해야 하나. 알림 발송 조건. 그것까지 내가 정리하는 건가. 체크리스트. 뭘 체크하지.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일단 사수한테 물었다. "경쟁사 분석 범위, 제가 정해도 될까요?" 답: "네, 일단 초안 만들어서 보여주세요." 초안. 또 초안이다. 검색했다. "경쟁사 분석 체크리스트." 누가 정리해놓은 거 봤다. 랜딩페이지, CTA 위치, 카피, 이미지, 전환 플로우... 복사해서 노션에 붙였다. 우리 상황에 맞게 수정했다. 경쟁사 분석 범위:대상: A사, B사, C사 (경쟁사 상위 3개) 페이지: 메인 랜딩페이지 분석 항목: CTA 위치/디자인, 카피, 이미지, 전환 플로우, 로딩 속도사수한테 보냈다. "이렇게 하면 될까요?" 답: "좋아요. 금요일까지 부탁해요." 오케이. 알림 발송 조건. 이건 기획서 찾아봤다. 예전에 사수가 쓴 거. 알림 발송 조건 (예시):결제 완료: 결제 성공 시 즉시 배송 시작: 운송장 번호 등록 시 배송 완료: 배송 상태 '완료'로 변경 시 이벤트: 수동 발송 (마케팅팀 요청) 공지: 수동 발송 (관리자)이걸 회의록에 추가했다. 근데 이건 내가 정한 건데, 개발팀이 동의한 건 아니잖아. 사수한테 물었다. "알림 발송 조건 제가 정리했는데, 개발팀 확인 필요할까요?" 답: "내일 데일리 스탠드업 때 확인받으세요." 내일 또 회의다. 체크리스트. 템플릿 A 수정 가능 범위. 템플릿 A 열었다. 노션 페이지로 만들어진 이벤트 페이지. 어디를 수정할 수 있나. 제목? 이미지? 쿠폰 영역? 템플릿 A 수정 가능 범위 체크리스트: 제목 텍스트 변경 서브 카피 변경 메인 이미지 교체 쿠폰 영역 개수 조정 (현재 2개 → 3개 가능?) CTA 버튼 텍스트 변경 배경색 변경개발자한테 슬랙 보냈다. "이 정도 수정 가능한가요?" 답: "쿠폰 3개는 레이아웃 수정 필요해요. 하루 더 걸려요." 체크리스트 수정. 쿠폰 영역 개수 조정 (2개 → 3개, 개발 1일 추가 소요)사수한테 공유. "내일 회의 때 이거 보여드리면 될까요?" 답: "네, 고생했어요." 7시 반. 퇴근 시간 지났다. 그 다음엔 받아적은 건 2시간. 정리한 건 3시간. 피드백 반영한 건 2시간. 회의 2시간에 후속 작업 5시간. 이게 회의록인가. 그냥 타이핑인가. 사수가 말했다. "처음엔 다 그래요. 몇 번 하다 보면 회의 중에 구조화해서 받아적을 수 있어요." 언제쯤 그렇게 되나. 검색했다. "회의록 잘 쓰는 법." 누가 썼다. "회의 중에 논의/결정/액션을 구분하면서 받아적어라." 해봤다. 안 된다. 말 따라가기도 바쁜데 구분을 어떻게 해. 유튜브 봤다. "주니어 기획자 회의록 작성법." 10분짜리 영상. 봤다. "회의 전에 안건 미리 파악하고, 양식 세팅해두세요." 아, 양식을 미리 만들어놓는 거구나. "회의 중에 누가 뭐라고 했는지보다, 뭐가 정해졌는지에 집중하세요." 결정 사항. 맞다. 그게 중요한 거지. "회의 끝나고 바로 정리하세요. 시간 지나면 기억 안 나요." 오늘 2시간 반 걸린 이유다. 내일부터 해봐야지. 회의 전에 양식 세팅. 회의 중에 결정 사항 표시. 회의 끝나고 바로 정리. 근데 회의가 하루에 3개면 정리할 시간이 있나. 모르겠다. 일단 해보자. 집 가는 지하철에서 노션 열었다. 오늘 회의록 3개 다시 봤다. 63개 불렛 포인트가 15개 액션 아이템이 됐다. 15개 중에 7개가 내 할 일이다. 경쟁사 분석, 알림 우선순위 표, 템플릿 검토, 발송 조건 확인, 수정 범위 공유... 회의 2시간에 일주일 치 일감이 나왔다. 이게 기획자인가. 받아적기만 하는 게 아니구나.받아적은 건 시작이다. 정리가 진짜다.

대학 동기 연인에게 '요즘 일은 어때?'라고 물었을 때 대답 못 했던 이유

대학 동기 연인에게 '요즘 일은 어때?'라고 물었을 때 대답 못 했던 이유

카페에서 멍했다 여자친구가 물었다. "요즘 일은 어때?" 나는 3초 멍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응... 그냥... 뭐 기획서 쓰고..." 말이 끊겼다. 여자친구가 웃었다. 억지 웃음이었다. "너 무슨 일 하는지 모르겠어." 나도 모르겠다. 1년 사귄 사이다. 대학 동기. 같은 과 출신이 아니라서 전공 얘기는 안 통한다. 그래도 직장 생활 얘기는 하고 싶었다. 여자친구는 마케터다. SNS 컨텐츠 만들고, 광고 집행하고, 성과 보고한다. 한 문장으로 설명 가능하다. 나는? 기획자다. 뭐 하는 사람? 설명 못 한다.회사 가면 바쁜데 출근하면 할 일은 많다. 아침: 사수 피드백 확인. "이 부분 다시", "여기 근거 부족", "화면 구조 이상함". 오전: 회의 3개. 디자인 검토, 개발 일정, 마케팅 협의. 점심: 12시 30분. 사수랑 먹는다. "너 이거 왜 이렇게 했어?" 밥맛 없다. 오후: 화면 정의서 수정. 버튼 위치 바꾸고, 텍스트 수정하고, 플로우 다시 그리고. 저녁: 내일 회의 자료 준비. 7시 반 퇴근. 바쁘다. 진짜 바쁘다. 근데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나는 화면 정의서를 써." "화면 정의서가 뭔데?" "음... 앱 화면에 뭐가 있는지 정리하는 거." "그게 일이야?" 할 말이 없다.사수가 시키는 거 하는 건데 정확히는 사수가 준 업무를 한다. "이 기능 화면 정의서 써봐." "네." "이번 주 업데이트 내용 정리해." "네." "회의록 작성해." "네." 내가 기획한 게 아니다. 사수가 이미 방향 정했다. 나는 디테일만 채운다. 버튼 문구, 팝업 내용, 예외 상황 처리. 이런 것들. 기획자 맞나? 검색해봤다. "주니어 기획자 업무".상위 기획자의 지시에 따라 세부 기획 수행 회의록 작성 및 이슈 트래킹 화면 정의서, 플로우차트 작성맞긴 맞다. 근데 이게 자랑스럽게 말할 일인가? "나는 시키는 거 하는 사람이야." 이렇게 말하면 여자친구가 뭐라고 생각할까. 저번 주에 여자친구가 말했다. "우리 팀장님이 내 아이디어 채택했어. 이번 캠페인 메인 카피 내가 썼어." 나는 "대박"이라고만 했다. 부러웠다. 나는 언제 내 아이디어로 뭔가 해볼까.기획자가 뭐 하는 사람이에요? 면접 때도 물어봤다. 이 질문. 준비한 답이 있었다. "사용자 니즈를 파악해서 서비스를 설계하는 사람입니다." 합격했다. 지금 다시 물으면 못 대답한다. 사용자 니즈? 사수가 정한다. 데이터 보고 결정한다. 나는 그냥 따른다. 서비스 설계? 큰 틀은 이미 있다. 나는 세부만 채운다. 그럼 나는 뭐 하는 사람? 노션 문서 작성하는 사람. 피그마 컴포넌트 복붙하는 사람. 회의에서 받아적는 사람. 이게 기획자인가. 유튜브 봤다. "주니어 기획자의 하루". 다들 비슷하다. 사수 밑에서 배운다. 문서 작성한다. 회의 참석한다. 위안이 됐다.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근데 여자친구한테 이렇게 말하면? "나는 아직 배우는 단계야. 사수 밑에서." 27살인데 아직 배우는 중. 자괴감 든다. 개발자가 "이거 안 돼요" 하면 제일 무서운 순간이다. 화면 정의서 다 썼다. 사수 검토 받았다. 개발팀 전달했다. 개발자가 메시지 보냈다. "신기획님, 이 기능은 구현 어려울 것 같은데요." 심장이 멈췄다. "아...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요?" "기획 다시 해주셔야죠." 대안이 없다. 왜 안 되는지 이해도 안 된다. 기술적으로 어렵다는데 뭐라고 반박하지? 사수한테 물었다. "이거 개발자가 어렵대요." "왜?" "기술적으로..." "구체적으로 뭐가 어렵다고?" 모른다. 안 물어봤다. "다시 물어봐." 개발자한테 다시 물었다. 설명 들었다. API 구조, DB 스키마, 캐싱 문제. 하나도 모르겠다. "아... 네. 그럼 제가 다시 기획해볼게요." 어떻게? 검색했다. "기획자 기술 지식". 다들 SQL 배우래. 개발 프로세스 이해하래. 주말에 SQL 강의 들었다. SELECT, WHERE, JOIN. 이해는 했다. 근데 실무에서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다. 여자친구가 물으면 뭐라고 하지? "나는 개발자랑 소통 잘 안 돼." 이렇게 말하면 무능해 보인다. 말 안 하는 게 낫다. 회의 때 고개만 끄덕였다 이번 주 회의. 신규 기능 논의. 팀장: "이 기능 어떻게 생각해요?" 디자이너: "UI 측면에서는..." 개발자: "기술적으로는..." 마케터: "유저 반응은..." 나: "..." 팀장이 날 봤다. "신기획님 생각은?" "아... 저는... 좋은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음... 사용자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요." 팀장이 웃었다. "근거는?" "..." 사수가 끼어들었다.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창피했다. 회의 끝나고 사수가 말했다. "회의 전에 미리 생각 좀 해와." "네... 죄송합니다." "미안해하지 말고 준비해." 준비를 어떻게 하지? 데이터 봐야 한다는데 어떤 데이터? GA 보는 법도 잘 모른다. 유저 리서치 해야 한다는데 어떻게? 설문지 만드는 법도 모른다. 경쟁사 분석 해야 한다는데 뭘 봐야 하지? 그냥 앱 다운받아서 써보는 게 다인가?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여자친구 친구들 만난 적 있다. 다들 직장 얘기한다. "우리 팀장님이 내 제안 채택했어." "이번 프로젝트 내가 리드했어." "고객사 미팅에서 내가 발표했어." 나는? "회의에서 받아적었어." 말 안 했다. PRD 양식 찾아서 따라 썼는데 사수가 말했다. "다음 기능부터는 네가 PRD 작성해봐." "네." PRD가 뭔지 검색했다. Product Requirement Document. 제품 요구사항 문서. 양식 검색했다. 수십 개 나왔다. 다 달랐다.목적/배경 타겟 유저 핵심 기능 성공 지표 일정/리소스이런 항목들. 그럴듯했다. 따라 썼다. 목적: 사용자 편의성 향상 타겟 유저: 20~30대 여성 핵심 기능: 원클릭 구매 성공 지표: 구매 전환율 10% 상승 사수한테 보냈다. 피드백 왔다. "왜 사용자 편의성 향상이 목적이야? 비즈니스 목표는?" "왜 20~30대 여성이 타겟이야? 데이터 근거는?" "원클릭 구매가 왜 핵심 기능이야? 다른 대안은 검토했어?" "구매 전환율 10% 상승. 왜 10%야? 현재가 몇 %인데?" 대답 못 했다. 그냥... 다른 PRD 보고 비슷하게 썼다. 사수가 말했다. "양식 채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왜 이걸 해야 하는지 설득하는 게 중요해." "네..." "다시 써봐. 이번엔 데이터부터 찾아보고." 데이터를 어디서 찾지? GA 열었다. 수치만 가득했다. 뭘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노션 검색했다. 과거 PRD 찾아봤다. 선배들이 쓴 거. 구조 분석했다. 아. 이렇게 쓰는 거구나. 다시 썼다. 3일 걸렸다. 사수: "나아졌네. 근데 여기 로직 좀 이상한데?" 또 수정. 이게 맞는 건가? 여자친구가 물으면? "나는 문서 쓰는데 시간 다 쓴다." 이렇게 말하면 한심해 보인다. 1년 뒤에도 이러고 있으면 무서운 생각이 든다. 지금 2년차. 3년차 되면 달라질까? 선배 기획자 봤다. 4년차. 여전히 사수한테 검토받는다. 여전히 회의에서 눈치 본다. 달라진 건? 문서 쓰는 속도. 그게 다. 10년차 기획자 링크드인 봤다. "주도적으로 프로덕트 방향 설정". 멋있다. 나는 언제 저렇게 되지? 유튜브에서 "시니어 기획자 vs 주니어 기획자" 봤다. 주니어: 화면 그린다. 문서 작성한다. 지시 받는다. 시니어: 방향 제시한다. 데이터 분석한다. 의사결정한다. 나는 주니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토이 프로젝트 해본다. 주말에. "나만의 앱 기획하기". PRD 써본다. 화면 그려본다. 근데 이게 실무에서 통할까? 모르겠다. 확신이 없다. 여자친구한테 솔직하게 다음 주 만났다. 카페. 여자친구가 또 물었다. "요즘 일은 어때?" 이번엔 솔직하게 말했다. "잘 모르겠어. 나 지금 뭐 하는 사람인지." "무슨 소리야?" "회사 가면 바쁜데 남한테 설명 못 하겠어. 내가 기획한 것도 없고. 사수가 시키는 거 하고. 회의에서 할 말도 없고." 여자친구가 웃었다. 이번엔 진짜 웃음이었다. "나도 그래." "너도?" "1년차 때 그랬어. 나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고. 팀장님 시키는 것만 하고. 내 아이디어라고 할 것도 없고." "진짜?" "응. 근데 2년차 되니까 좀 보이더라. 내가 뭘 배우고 있는지." 위로가 됐다. "너 뭐 배우고 있는데?" "문서 쓰는 법. 개발자랑 대화하는 법. 데이터 보는 법. 회의에서 의견 내는 법." 맞다. 나도 배우고 있다. 당장 잘하는 건 아니지만. "그럼 너 지금 일 괜찮은 거야?" "응. 힘들긴 한데 배우는 중이야." 여자친구가 웃었다. "그렇게 말하면 되지." 그렇구나. "요즘 일은 어때?" "힘든데 배우는 중." 이렇게 대답하면 되는 거였다. 완벽하지 않아도. 뭔가 대단한 거 하지 않아도. 배우고 있으면 되는 거.말 못 하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 배우는 중이라고 말 못 하는 게 부끄러운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