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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 28 Dec, 2025
'제가 정리해서 공유드리겠습니다' 남발하기
또 손들었다 "제가 정리해서 공유드리겠습니다." 오늘만 다섯 번째다. 회의 때 두 번, 슬랙에서 세 번. 손이 먼저 움직인다. 누가 뭐 얘기하면 반사적으로 "제가 정리할게요" 친다. 사수가 웃으면서 말했다. "신기획 씨, 정리왕이네요?" 왕 아니다. 불안한 거다.회의 끝나고 30분 안에 회의록 쓴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쓴다. 액션 아이템 정리, 담당자 태그, 일정 체크. 노션에 올리고 슬랙에 공유. "수고했어요." 이모지 세 개 받으면 안도한다. 근데 왜 이러는 걸까. 어제 선배한테 물었다. "선배, 저 너무 정리 많이 하는 것 같지 않아요?" "응, 많이 해. 근데 나쁜 건 아니야." 나쁜 건 아니지만 좋은 건지는 모르겠다는 뉴앙스였다. 배우고 싶어서 처음엔 진짜 배우고 싶어서였다. 회의 내용 정리하면서 맥락이 보인다. 왜 이 기능을 만드는지, 왜 이 화면이 필요한지. 받아적기만 할 때는 몰랐던 게 보인다. 사수가 던진 질문, 개발자가 한 반박, PM이 내린 결정. 그걸 정리하면서 "아, 이래서 이렇게 되는구나" 이해한다.입사 6개월 차 때 깨달았다. 정리는 최고의 학습법이다. 남이 말한 걸 내 언어로 바꾸는 과정. 흩어진 정보를 구조화하는 연습. 핵심과 부차적인 걸 구분하는 훈련. 그래서 더 정리했다. 회의록, 요구사항, 피드백, 이슈 리스트. 다 내가 정리했다. 근데 6개월 지나니까 문제가 보였다. 정리만 하고 있다 정리하는 데 하루 2시간 쓴다. 회의록 30분, 요구사항 정리 1시간, 피드백 정리 30분. 기획서 쓰는 시간은? 3시간. 뭔가 이상하다. 정리가 기획보다 많다.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정리만 잘하는 사람이 되고 있다. 저번 주 1on1에서 사수가 물었다. "요즘 뭐 배웠어?" "음... 회의록 잘 쓰는 법이요?" 사수 표정이 미묘했다. 그게 배울 건 아니잖아. 2년 차가. 정리는 수단이다. 목적이 아니다. 근데 나는 정리를 목적처럼 하고 있었다. 더블 체크하고 싶어서 솔직히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불안해서. 내가 정리 안 하면 누가 할까. 혹시 빠트린 거 있으면? 혹시 잘못 이해한 거 있으면? 그래서 모든 걸 내가 정리한다. 확인한다. 더블 체크한다. 이게 책임감일까, 불안일까. 어제 개발자한테 들었다. "기획님, 이거 정리 안 하셔도 돼요. 저희가 잘 알아요." "아 그래도 혹시 몰라서..." "괜찮아요. 믿으셔도 돼요." 믿는 게 어렵다. 내가 안 하면 뭔가 틀어질 것 같다. 선배가 말했다. "그거 통제욕이야. 모든 걸 내가 파악하고 있어야 안심되는 거." 맞다. 통제욕이다. 정리 요청을 거절하는 연습 오늘 회의에서 또 손이 올라갔다. "제가 정리..." 참았다. 입을 다물었다. 5초 침묵. 다른 팀원이 말했다. "제가 할게요." 세상에. 된다. 내가 안 해도 된다. 그 뒤로 연습 중이다. "제가 정리할게요" 안 말하기. 규칙을 정했다.하루 정리 건수 2개까지 요청받은 것만 정리 정리 시간 1시간 넘기지 않기처음엔 불안했다. 근데 별일 없다. 다른 사람도 정리 잘한다. 당연하다. 다들 프로니까. 내가 안 해도 된다는 걸 배우는 중이다. 정리는 도구다 어제 사수가 물었다. "요즘은 뭐 배워?" "음... 정리를 덜 하는 법이요." 사수가 웃었다. "그것도 배움이네." 맞다. 정리를 덜 하는 것도 배움이다. 정리는 도구다. 배우기 위한 수단이다. 근데 나는 정리 자체가 목적이 됐었다. 이제는 선택한다. 이 회의는 정리할 가치가 있나. 이 내용은 내가 정리해야 하나. 모든 걸 정리하면 아무것도 못 배운다. 정리하는 데 시간 다 쓰니까. 정리 대신 뭘 하나. 기획서 쓴다. 데이터 분석한다. 경쟁사 리서치한다. 사수한테 질문한다. 정리는 누구나 한다. 기획은 나만 할 수 있다. 그래도 가끔은 그래도 가끔은 한다. 정리. 특히 중요한 회의. 의사결정 과정이 복잡한 건. 이건 내가 정리해야 나중에 써먹는다. 근데 이제는 다르다. 모든 걸 다 정리 안 한다. 핵심만 정리한다. 회의록 양식도 바꿨다. A4 3장 → 5줄 요약. 누가 뭘 결정했는지만 쓴다. 시간이 남는다. 그 시간에 기획한다. 정리왕 졸업 오늘 슬랙에 메시지가 왔다. "기획님, 이거 정리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예전 같으면 "네 바로 할게요!" 였다. 오늘은 달랐다. "급하신가요? 내일 오전에 드려도 될까요? 지금 다른 작업 중이라서요." "네 괜찮아요!" 거절할 수 있다. 우선순위를 말할 수 있다. 정리왕에서 기획자로 가는 중이다. 아직 멀었지만."제가 정리할게요"는 성장통이었다. 이제는 "이거 꼭 제가 해야 하나요?"를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