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From
기획자의
- 12 Dec, 2025
년차별로 보는 기획자의 성장 단계, 나는 어디쯤?
2년차인데 1.5년차 같은 기분 오늘 사수가 물었다. "2년 됐는데 아직도 이런 거 물어봐?" 뭘 물어봤냐면. PRD에 '비즈니스 임팩트' 써야 하는데 어떻게 쓰는지 몰라서였다. 사수 표정이 묘했다. 실망한 것도 아니고, 화난 것도 아니고. 그냥 "아 그래?" 하는 느낌. 집에 와서 계속 생각했다. 나는 2년차다. 근데 왜 1.5년차 같지. 아니 솔직히 1년차 같을 때도 있다. 검색했다. "기획자 년차별 역량". 나왔다. 1년차는 이거, 2년차는 저거, 3년차는 그거. 표 깔끔하게 정리된 블로그 글 많더라. 읽으면서 식은땀 났다.1년차: 기획서 양식이 뭔지 모르던 시절 입사 첫날. 사수가 노션 링크 하나 보냈다. "여기 템플릿 있어. 이거 보고 써봐." 템플릿 열었다. 뭔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더라. 배경 및 목적 AS-IS / TO-BE 요구사항 정의 화면 정의서 플로우 차트 비기능 요구사항"비기능 요구사항이 뭐지?" 검색했다. 나왔다. 성능, 보안, 확장성. 그래서 뭘 어떻게 쓰라고? 그때는 진짜 아무것도 몰랐다. 회의록도 못 썼다. 누가 뭐라고 했는지는 받아적는데, 이게 중요한 건지 아닌지 몰라서 다 적었다. A4 5장. 사수가 봤다. "이거 다 필요한 거야?" 몰랐다. 그냥 다 적었다. 1년차 때 배운 것:기획서는 양식이 있다 회의록은 결론 위주로 쓴다 개발자한테 물어보기 전에 검색부터 "확인해보겠습니다" 만능 문장근데 이게 다였다. 1년 내내.2년차: 논리는 알겠는데 설득은 어려움 지금. 2년 3개월. 이제 기획서는 쓴다. 양식도 안다. 화면 정의서도 그린다. 피그마로 와이어프레임도 만든다. 근데. 회의 때 개발팀장이 물었다. "이거 왜 이렇게 기획했어요?" "...사용자가 편할 것 같아서요." "데이터 있어요?" 없다. "그럼 개발 공수는 고려했어요?" 안 했다. 팀장이 웃었다. 비웃는 게 아니라 그냥 웃었다. "다음엔 먼저 물어봐요." 창피했다. 2년차 되면 달라질 줄 알았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근데 아직도 "그냥 좋을 것 같아서"에서 못 벗어났다. 블로그 글들 보면 2년차는 이래야 한대:데이터 기반 의사결정 이해관계자 설득 우선순위 판단 대안 제시나는 4개 중에 0.5개 한다. 우선순위는 좀 안다. 급한 거 먼저. 그 정도. 사수가 말했다. "넌 손은 빠른데 머리가 안 따라와." 맞는 말이다.3년차는 어떤 느낌일까 3년차 선배가 있다. 다른 팀. 걔는 다르다. 회의 때 개발자가 "이거 안 돼요" 하면 바로 대안 낸다. "그럼 이렇게 하면 어때요?" 개발자가 고개 끄덕인다. 데이터도 들고 온다. "지난달 전환율이 3.2%인데, 이거 개선하면 4% 갈 것 같아요." 숫자로 말한다. 나는 숫자가 없다. "좀 나아질 것 같아요." 이게 끝이다. 3년차 선배한테 물어봤다. "어떻게 그렇게 해요?" "음... 많이 깨져봐서?" 도움 안 되는 답변. "근데 넌 2년차치고 잘하는 편이야. 나 2년차 땐 더 못했어." 위로인지 진심인지 모르겠다. 검색한 3년차 역량:프로젝트 리딩 주니어 멘토링 전략 수립 크로스펑셔널 커뮤니케이션1년 뒤에 저거 할 수 있을까. 솔직히 모르겠다. 나는 지금 어디쯤인가 엑셀 켰다. 표 만들었다. 년차별 역량 체크리스트. 1년차 항목: 기획서 양식 이해 회의록 작성 화면 정의서 작성 기본 커뮤니케이션2년차 항목:[△] 데이터 분석 (SQL 아직 어려움) [△] 논리적 설득 (가끔 됨) 와이어프레임 제작 [△] 이해관계자 조율 (사수 도움 필요) 우선순위 판단 (혼자 못함) 프로젝트 단독 진행절반. 2년차인데 1.75년차 정도. 근데 이게 문제인가? 사수가 말했다. "성장은 계단이 아니라 곡선이야." 무슨 소린지 몰랐는데 요즘 알 것 같다. 1년 차에서 2년 차로 딱 넘어가는 게 아니다. 어떤 날은 2.5년차처럼 일하고, 어떤 날은 0.5년차처럼 무너진다. 어제 화면 정의서 30분 만에 끝냈다. 사수가 "수정사항 없네" 했다. 3년차 느낌. 오늘 개발자한테 "이거 가능해요?" 물어봤다. "그 정도는 직접 판단해봐요." 돌아왔다. 1년차 느낌. 곡선이 맞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블로그 글 보면 답 나온다. "꾸준히 성장하세요", "데이터 공부하세요", "멘토 찾으세요". 맞는 말이다. 근데 위로는 안 된다. 나는 그냥 2년차다. 1.5년차 같기도 하고, 2년차 같기도 하고, 가끔 3년차 흉내도 낸다. 내일 출근하면 또 사수한테 물어볼 것이다. "이거 어떻게 써요?" 쪽팔리다. 근데 뭐 어쩌나. 모르는 걸. 1년 뒤에는 3년차 선배처럼 될까? 모르겠다. 근데 1년 전보단 나아졌다. 그건 확실하다. 기획서 쓸 때 양식 검색 안 한다. 머릿속에 있다. 회의 때 받아적기만 하던 나는 이제 질문도 한다. 가끔. 곡선이 맞다. 계단 아니다. 오늘은 1.8년차 기분. 내일은 2.1년차일지도. 그냥 간다. 출근한다. 기획서 쓴다. 깨진다. 배운다. 언젠간 3년차 되겠지.2년차인데 1.5년차 같아도 괜찮다. 곡선이니까.
- 05 Dec, 2025
비전공 기획자의 CS 지식 콤플렉스
회의실에서 얼어붙는 순간 "이 부분은 캐시 처리로 해결하면 될 것 같은데요." 개발팀장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캐시. 뭔가 빠르게 하는 거다. 그 정도는 안다. 하지만 정확히 뭔지는 모른다. 노트북 화면에 '캐시 처리 검토' 라고 적었다. 손에 땀이 났다. "기획자님 생각은요?" 팀장이 나를 봤다. 심장이 빨라졌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좋을 것 같다니. 나도 내가 한심했다. 회의가 끝났다. 화장실에 가서 '캐시란' 검색했다. 임시 저장소. 빠른 접근. 그래, 이거였구나. 2년차인데 아직도 이런다.몰래 검색하는 일상 오전 10시 30분. 데일리 스크럼. "API 응답 시간이 너무 길어서요." 개발자가 말했다. 나는 노션 창 뒤에서 구글을 켰다. 'API란 무엇인가' 검색창에 친다. 백엔드 개발자가 계속 말하고 있다. 나는 검색 결과를 빠르게 훑었다. 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 프로그램 간 소통 방식. 아, 그러니까 우리 앱이 서버한테 데이터 달라고 하는 거구나. "기획 쪽에서 확인할 부분 있나요?" 나를 봤다. "아... 로딩 화면 추가하는 건 어떨까요?" "그것도 방법이긴 한데, 근본적 해결은 아니죠." 맞다. 근본적 해결이 아니다. 나는 또 땜질 기획을 했다. 회의가 끝나고 자리에 앉았다. 노션에 용어 정리 페이지를 만들었다.API: 프로그램 간 소통 창구 캐시: 임시 저장소, 빠른 접근용 세션: 사용자 접속 정보 유지이렇게 모아놓은 게 벌써 50개다. 근데 모아만 놓고 제대로 이해한 건지 모르겠다.들킬까봐 무서운 순간들 가장 무서운 건 개발자가 내 기획서를 볼 때다. "이 부분, 세션 만료되면 어떻게 처리할 거예요?" 세션 만료. 로그인 풀리는 거 아닌가. "로그인 화면으로 보내면 될 것 같은데요." "그럼 작성하던 내용은요?" "아..." 생각 못 했다. 또 구멍이 났다. "로컬 스토리지에 임시 저장하면 되겠네요. 제가 정리해서 공유할게요." 개발자가 말했다. 고맙다. 그런데 창피했다. 로컬 스토리지. 또 모르는 용어다. 사수가 말했다. "비전공이라 힘들지?" 솔직하게 말했다. "네... 용어가 너무 어렵습니다." "나도 처음엔 그랬어. 근데 기획자가 다 알 필요는 없어. 물어보면 돼." 물어보면 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매번 물어보면 무능해 보일 것 같다. 신입 때는 몰라도 됐다. 2년차인데 아직도 모르면 문제 아닌가. 검색창에 '로컬 스토리지'를 쳤다. 브라우저 저장소. 세션 스토리지보다 오래 유지. 그럼 세션 스토리지는 또 뭔데. 끝이 없다.비전공의 생존법 유튜브에 'CS 기초' 강의가 500개는 된다. 북마크만 300개다. 본 건 10개. 주말마다 공부하려고 했다. 근데 주말엔 친구를 만나고 여자친구를 만나고 밀린 빨래를 했다. 그러다 월요일이 온다. "Redis 캐싱 적용하면 어떨까요?" Redis. 또 새로운 단어다. 점심시간. 사수한테 물어봤다. "형, Redis가 정확히 뭔가요?" "캐시 저장소야. 메모리 기반이라 빠르지." "메모리 기반이요?" "RAM에 저장한다는 거. DB는 디스크에 저장하잖아." RAM, 디스크.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거 언제 다 배워요?" "배우는 게 아니라 부딪치면서 익히는 거지. 나도 아직 모르는 거 많아." 사수도 모르는 게 많다고 했다. 조금 위안이 됐다. 그날 저녁. 'Redis 입문' 영상을 켰다. 20분짜리였다. 10분 보다가 졸았다. 이게 맞나 싶다. 알은 척하는 기술 회의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했다. 첫째, 모르는 용어 나오면 받아적는다. 둘째, "확인해보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셋째, 회의 끝나고 검색한다. 넷째, 다음 회의 전에 그 용어 들어간 문장을 한 번 말해본다. "API 응답 속도 개선안을 정리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반만 안다. 동기한테 물어봤다. "너도 그래?" "나도 그러지. 근데 1년 전보다는 나아졌어." "언제쯤 당당해질까?" "글쎄. 5년차 선배도 가끔 모른다고 하던데." 그래도 선배는 모른다고 말할 용기가 있다. 나는 아직 그게 무섭다. "이거 무슨 뜻이에요?" 이 한 마디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성장하는 중이라고 믿고 싶다 어제 기획서를 썼다. 개발자가 피드백을 줬다. "이 부분 API 설계 고려해주셨네요. 좋습니다." 칭찬이었다. 작은 거지만 기뻤다. 지난주에 배운 REST API 개념을 적용한 거였다. GET, POST, DELETE. 이 정도는 이제 안다.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6개월 전보다는 안다. 노션 용어집을 다시 봤다. 50개가 100개가 됐다.API: 프로그램 간 소통 창구, REST 방식이 일반적 캐시: 임시 저장소, Redis 같은 인메모리 DB 사용 세션: 로그인 상태 유지, 만료 시간 있음 로컬 스토리지: 브라우저 저장소, 영구 보관 쿠키: 브라우저 저장 데이터, 용량 작음예전엔 단어만 적었다. 이젠 설명이 붙는다. 완벽하지 않다. 깊이는 부족하다. 그래도 전보다는 낫다. 사수가 말했다. "CS 지식은 기획자한테 필수는 아니야. 근데 있으면 편하지." 맞다. 필수는 아니다. 그런데 없으면 불안하다. 개발자와 대화할 때, 뭔가 막힌다. 벽이 있는 느낌이다. 그 벽을 넘고 싶다. 천천히라도. 2년차의 솔직한 고백 아직도 모르는 게 더 많다. 도커가 뭔지, 쿠버네티스가 뭔지, CI/CD가 뭔지. 개발자들이 하는 말의 절반은 못 알아듣는다. 그래도 작년보다는 낫다. 작년엔 80%를 몰랐다. 지금은 50%. 천천히 줄어들고 있다. 언젠가는 당당하게 "이거 모르겠는데 설명해주세요"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개발자가 설명할 때 바로 이해할 수 있을까. 2년차는 아직 그런 날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는 않는다. 오늘도 유튜브 강의 하나를 북마크했다. 볼지는 모르겠지만.비전공 기획자의 CS 공부는 끝이 없다. 그래도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더 안다. 그걸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