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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자의
- 05 Dec, 2025
비전공 기획자의 CS 지식 콤플렉스
회의실에서 얼어붙는 순간 "이 부분은 캐시 처리로 해결하면 될 것 같은데요." 개발팀장이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캐시. 뭔가 빠르게 하는 거다. 그 정도는 안다. 하지만 정확히 뭔지는 모른다. 노트북 화면에 '캐시 처리 검토' 라고 적었다. 손에 땀이 났다. "기획자님 생각은요?" 팀장이 나를 봤다. 심장이 빨라졌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좋을 것 같다니. 나도 내가 한심했다. 회의가 끝났다. 화장실에 가서 '캐시란' 검색했다. 임시 저장소. 빠른 접근. 그래, 이거였구나. 2년차인데 아직도 이런다.몰래 검색하는 일상 오전 10시 30분. 데일리 스크럼. "API 응답 시간이 너무 길어서요." 개발자가 말했다. 나는 노션 창 뒤에서 구글을 켰다. 'API란 무엇인가' 검색창에 친다. 백엔드 개발자가 계속 말하고 있다. 나는 검색 결과를 빠르게 훑었다. Application Programming Interface. 프로그램 간 소통 방식. 아, 그러니까 우리 앱이 서버한테 데이터 달라고 하는 거구나. "기획 쪽에서 확인할 부분 있나요?" 나를 봤다. "아... 로딩 화면 추가하는 건 어떨까요?" "그것도 방법이긴 한데, 근본적 해결은 아니죠." 맞다. 근본적 해결이 아니다. 나는 또 땜질 기획을 했다. 회의가 끝나고 자리에 앉았다. 노션에 용어 정리 페이지를 만들었다.API: 프로그램 간 소통 창구 캐시: 임시 저장소, 빠른 접근용 세션: 사용자 접속 정보 유지이렇게 모아놓은 게 벌써 50개다. 근데 모아만 놓고 제대로 이해한 건지 모르겠다.들킬까봐 무서운 순간들 가장 무서운 건 개발자가 내 기획서를 볼 때다. "이 부분, 세션 만료되면 어떻게 처리할 거예요?" 세션 만료. 로그인 풀리는 거 아닌가. "로그인 화면으로 보내면 될 것 같은데요." "그럼 작성하던 내용은요?" "아..." 생각 못 했다. 또 구멍이 났다. "로컬 스토리지에 임시 저장하면 되겠네요. 제가 정리해서 공유할게요." 개발자가 말했다. 고맙다. 그런데 창피했다. 로컬 스토리지. 또 모르는 용어다. 사수가 말했다. "비전공이라 힘들지?" 솔직하게 말했다. "네... 용어가 너무 어렵습니다." "나도 처음엔 그랬어. 근데 기획자가 다 알 필요는 없어. 물어보면 돼." 물어보면 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매번 물어보면 무능해 보일 것 같다. 신입 때는 몰라도 됐다. 2년차인데 아직도 모르면 문제 아닌가. 검색창에 '로컬 스토리지'를 쳤다. 브라우저 저장소. 세션 스토리지보다 오래 유지. 그럼 세션 스토리지는 또 뭔데. 끝이 없다.비전공의 생존법 유튜브에 'CS 기초' 강의가 500개는 된다. 북마크만 300개다. 본 건 10개. 주말마다 공부하려고 했다. 근데 주말엔 친구를 만나고 여자친구를 만나고 밀린 빨래를 했다. 그러다 월요일이 온다. "Redis 캐싱 적용하면 어떨까요?" Redis. 또 새로운 단어다. 점심시간. 사수한테 물어봤다. "형, Redis가 정확히 뭔가요?" "캐시 저장소야. 메모리 기반이라 빠르지." "메모리 기반이요?" "RAM에 저장한다는 거. DB는 디스크에 저장하잖아." RAM, 디스크.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다. "이런 거 언제 다 배워요?" "배우는 게 아니라 부딪치면서 익히는 거지. 나도 아직 모르는 거 많아." 사수도 모르는 게 많다고 했다. 조금 위안이 됐다. 그날 저녁. 'Redis 입문' 영상을 켰다. 20분짜리였다. 10분 보다가 졸았다. 이게 맞나 싶다. 알은 척하는 기술 회의에서 살아남는 법을 터득했다. 첫째, 모르는 용어 나오면 받아적는다. 둘째, "확인해보겠습니다" 라고 말한다. 셋째, 회의 끝나고 검색한다. 넷째, 다음 회의 전에 그 용어 들어간 문장을 한 번 말해본다. "API 응답 속도 개선안을 정리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반만 안다. 동기한테 물어봤다. "너도 그래?" "나도 그러지. 근데 1년 전보다는 나아졌어." "언제쯤 당당해질까?" "글쎄. 5년차 선배도 가끔 모른다고 하던데." 그래도 선배는 모른다고 말할 용기가 있다. 나는 아직 그게 무섭다. "이거 무슨 뜻이에요?" 이 한 마디가 왜 이렇게 어려운지. 성장하는 중이라고 믿고 싶다 어제 기획서를 썼다. 개발자가 피드백을 줬다. "이 부분 API 설계 고려해주셨네요. 좋습니다." 칭찬이었다. 작은 거지만 기뻤다. 지난주에 배운 REST API 개념을 적용한 거였다. GET, POST, DELETE. 이 정도는 이제 안다.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6개월 전보다는 안다. 노션 용어집을 다시 봤다. 50개가 100개가 됐다.API: 프로그램 간 소통 창구, REST 방식이 일반적 캐시: 임시 저장소, Redis 같은 인메모리 DB 사용 세션: 로그인 상태 유지, 만료 시간 있음 로컬 스토리지: 브라우저 저장소, 영구 보관 쿠키: 브라우저 저장 데이터, 용량 작음예전엔 단어만 적었다. 이젠 설명이 붙는다. 완벽하지 않다. 깊이는 부족하다. 그래도 전보다는 낫다. 사수가 말했다. "CS 지식은 기획자한테 필수는 아니야. 근데 있으면 편하지." 맞다. 필수는 아니다. 그런데 없으면 불안하다. 개발자와 대화할 때, 뭔가 막힌다. 벽이 있는 느낌이다. 그 벽을 넘고 싶다. 천천히라도. 2년차의 솔직한 고백 아직도 모르는 게 더 많다. 도커가 뭔지, 쿠버네티스가 뭔지, CI/CD가 뭔지. 개발자들이 하는 말의 절반은 못 알아듣는다. 그래도 작년보다는 낫다. 작년엔 80%를 몰랐다. 지금은 50%. 천천히 줄어들고 있다. 언젠가는 당당하게 "이거 모르겠는데 설명해주세요" 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언젠가는 개발자가 설명할 때 바로 이해할 수 있을까. 2년차는 아직 그런 날이 오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는 않는다. 오늘도 유튜브 강의 하나를 북마크했다. 볼지는 모르겠지만.비전공 기획자의 CS 공부는 끝이 없다. 그래도 어제보다 오늘이 조금 더 안다. 그걸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