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수가 '이거 왜 이렇게 했어?'라고 물었을 때의 얼어버리는 심정
- 02 Dec, 2025
사수의 한마디, 그리고 3시간의 공포
화면 정의서를 제출했다. 월요일 오전 10시. 사수에게 슬랙으로 링크를 보냈다. “검토 부탁드립니다”라고 정중하게. 다섯 번 읽고 보냈다.
그리고 3시간이 지났다.
오후 1시. 사수가 콜을 잡았다. 1:1 미팅 15분. 간단한 거라고 했다. 나는 노트북을 들었다. 펜을 들었다. 준비됐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화면을 띄웠다. 내가 설계한 화면. 로그인 후 온보딩 플로우. 3개 스텝. 심플한 구조다. 나는 자랑스러웠다.
사수가 말했다.
“이거 왜 이렇게 했어?”

끝이다. 내 논리는 여기서 끝난다. 그 순간 뇌가 정지했다. 평소처럼 대답하려고 했는데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마우스를 집었다. 놓았다. 다시 집었다.
“어… 그게…”
“3개 스텝이 필요해? 2개는 안 돼?”
아. 맞다. 2개로 할 수 있겠는데? 근데 왜 3개로 했더라? 나는 뭘 생각하고 있었나?
“네… 확인해보겠습니다.”
망했다. 이건 확인하는 게 아니다. 내가 설계한 건데 내가 왜 했는지 모르고 있다. 이게 기획자인가? 이건 그냥 따라 하기인가?
사수는 계속했다.
“그리고 여기 입력 폼 필드가 너무 많아. 유저가 이 단계에서 입력해야 할 것만 해. 나머지는 다음 단계에서.”
“네… 알겠습니다…”
“숫자로 정렬한 이유가 있어? 아니면 그냥 한 건데?”
그냥 한 거다. 다들 이렇게 하는 거 같았다. 선배 기획서를 봤고 그렇게 돼 있어서. 근데 왜냐고 물어보면 대답할 수 없다.
“제가… 다시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는 계속 이렇게 갔다. 15분이 30분이 됐다. 내 답변은 계속 같았다.
“확인해보겠습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수정하겠습니다.”
마지막에 사수가 웃었다. 좋은 의미의 웃음은 아니었다. 그냥… 답답한 웃음. 선배가 느끼는 그 감정이 마이크를 통해 전해졌다. ‘또 설명해야 하나.‘
온보딩 화면의 비극
내가 뭘 잘못했는지 천천히 깨달았다.
온보딩은 3개 스텝이었다. 단계 1: 휴대폰 번호 입력. 단계 2: 인증 번호 입력 + 이름 입력 + 생년월일 입력. 단계 3: 약관 동의.
왜 3개? 노션에 템플릿이 3단계 구조로 돼 있었다. 난 그걸 복사했다. 생각을 안 했다.
근데 사수가 묻는 건 간단했다. “왜 2개 아닌데 3개야?”
좋은 질문이다. 유저의 입장에서는 3번 클릭하는 게 맞나? 아니면 2번? 아니면 1번? 이걸 내가 먼저 생각했어야 했다.
내가 그 시점에서 해야 할 일:
- 왜 3개를 설정했는지 논리를 대기
- 논리가 없으면 인정하기
- 대신 “이렇게 개선해보겠습니다”라는 액션 제시하기
나는 1번을 못 했다. 논리가 없었으니까. 2번도 못 했다. 인정이 무서웠다. 그냥 3번을 했다. “수정하겠습니다.”
근데 이게 뭐 하는 직업인가? 남 말에 따라 수정하는 기계? 그건 기획자가 아니라 그냥 입력자다.

같은 날 오후 5시, 화장실에서
나는 개의 기획서를 다시 열었다. 화장실이었다. 사무실에서는 너무 부끄러웠다.
온보딩 3단계. 정말 3단계가 필요한가?
사용자 관점:
- 휴대폰 인증까지는 필수
- 추가 정보 입력은… 지금 꼭 필요한가?
개발자 관점:
- 3개 페이지는 3배의 상태 관리
- 데이터 저장 로직이 복잡해짐
- 이탈율이 높아질 수 있음
디자이너 관점:
- 3번 디자인해야 함
- 애니메이션 처리
내가 이 걸 미리 생각했으면? 기획서에 썼을 텐데. “온보딩을 2단계로 설계한 이유: 1) 초기 진입 장벽 최소화 2) 개발 복잡도 감소 3) 유저 이탈율 예상 감소”
이 정도면 대답이다. 토론할 수 있는 기초.
근데 나는 “왜냐하면 그렇게 봤으니까”라고만 했다. 이건 기획이 아니다. 배낭이다.
화장실에서 30분을 있었다. 사람들이 들어왔다가 나갔다. 나는 계속 온보딩 플로우를 보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화면을 헤치고 있었다.
2단계가 맞을 것 같았다. 근데 정말 맞나? 혹시 1단계는? 아니면 4단계?
그걸 판단하려면 데이터가 필요한데 난 데이터가 없다. 데이터가 없으면 논리가 약한데 논리가 약하면 설득이 안 된다.
그래서 난 항상 “확인해보겠습니다”만 한다.
퇴근 후, 유튜브 강의 시간
집에 왔다. 라면을 끓였다. 먹으면서 PM 유튜브를 켰다.
“기획서 작성법 - 논리적 사고”
40분짜리 강의. 보기 시작했다.
강사는 말했다. “모든 설계 결정에는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비즈니스, 유저, 기술 중 하나 이상에서 나와야 합니다.”
내 온보딩 3단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템플릿이었다.
강사는 계속했다. “만약 사수가 ‘왜?‘라고 물었을 때 답할 수 없다면 그 설계는 설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복사입니다.”
가슴이 철렁했다.
난 계속 복사하고 있었다. 기획서 템플릿 찾아서 구조 따라 하고. 선배 화면 보고 비슷하게 하고. 피그마 피드백 받고 수정하고.
기획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면서 기획자라고 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사수 앞에서
화요일. 10시. 사수가 또 미팅을 잡았다.
나는 밤새 온보딩을 다시 설계했다. 2단계로. 1단계에서는 휴대폰 + 인증 + 이름. 2단계에서는 약관 동의. 생년월일은 나중에.
왜? 이유가 있었다.
- 초기 완료 시간 1분대로 단축 (유저 진입 용이)
- 개발 상태 관리 단순화 (개발자 팀 피드백 반영)
- 추가 정보는 프로필 완성 때 이용 가능 (선택 입력으로 변경)
정도면 충분했다. 완벽하진 않지만 생각이 있었다.
사수가 물었다. “어제 피드백 반영했어?”
“네. 2단계로 변경했습니다. 이유는…”
처음이었다. 내 설계 이유를 말하는 게. 떨렸다.
사수는 들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게 맞는 접근이야.”
4글자. “좋아. 이게 맞는 접근이야.”
그게 얼마나 큰 말씀인지 난 알았다. 어제는 “확인해보겠습니다”만 했는데 오늘은 “이유가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 차이가 크다.
“근데 생년월일을 왜 빼?”
또 물었다. 근데 이번엔 답이 있었다.
“초기 가입 과정에 필수 정보가 아니어서…”
“맞아. 계속 이렇게 생각해.”
2주 후
2주가 지났다. 기획서를 쓸 때 이제 먼저 생각한다.
“이 화면이 왜 필요한가?” “유저는 뭘 원하는가?” “개발자는 뭘 쉽게 하고 싶어 하나?” “디자이너는 뭘 명확히 하고 싶어 하나?”
여전히 완벽하진 않다. 데이터도 부족하고 경험도 부족하다. 근데 그래도 다르다.
사수가 “왜 이렇게 했어?”라고 물었을 때 이제 얼어버리지 않는다. 틀릴 수도 있지만 대답이 있다.
어제는 내가 설계한 결제 플로우를 제시했다. 사수가 물었다. “왜 이 순서야?”
“유저 실수를 줄이기 위해 결제 금액 확인을 먼저 놨습니다. 그 다음 결제 수단 선택. 마지막에 최종 확인.”
“좋아.”
그 한 마디가 이제는 두렵지 않다. 그건 내 설계가 완벽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건 내가 생각을 했다는 뜻이다.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기획자가 뭐 하는 사람인지 아직도 완벽히 모르지만 한 가지는 안다. 복사 기계가 아니라는 것.
사수한테 여전히 질문할 때 눈치는 본다. 근데 틀린 질문을 하지는 않는다. 뭘 모르는지 알고 질문하니까.
“이 부분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물으면 답이 나온다. 그 다음엔 배운다.
“왜 이렇게 했어?”라는 질문은 이제 공포가 아니다. 그건 그냥 대화다.
오후 3시. 사수 콜. 여전히 긴장된다. 근데 다르다.
“왜?”를 두려워하지 말고 먼저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