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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에게
- 15 Dec, 2025
대학 동기 연인에게 '요즘 일은 어때?'라고 물었을 때 대답 못 했던 이유
카페에서 멍했다 여자친구가 물었다. "요즘 일은 어때?" 나는 3초 멍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응... 그냥... 뭐 기획서 쓰고..." 말이 끊겼다. 여자친구가 웃었다. 억지 웃음이었다. "너 무슨 일 하는지 모르겠어." 나도 모르겠다. 1년 사귄 사이다. 대학 동기. 같은 과 출신이 아니라서 전공 얘기는 안 통한다. 그래도 직장 생활 얘기는 하고 싶었다. 여자친구는 마케터다. SNS 컨텐츠 만들고, 광고 집행하고, 성과 보고한다. 한 문장으로 설명 가능하다. 나는? 기획자다. 뭐 하는 사람? 설명 못 한다.회사 가면 바쁜데 출근하면 할 일은 많다. 아침: 사수 피드백 확인. "이 부분 다시", "여기 근거 부족", "화면 구조 이상함". 오전: 회의 3개. 디자인 검토, 개발 일정, 마케팅 협의. 점심: 12시 30분. 사수랑 먹는다. "너 이거 왜 이렇게 했어?" 밥맛 없다. 오후: 화면 정의서 수정. 버튼 위치 바꾸고, 텍스트 수정하고, 플로우 다시 그리고. 저녁: 내일 회의 자료 준비. 7시 반 퇴근. 바쁘다. 진짜 바쁘다. 근데 이걸 어떻게 설명하지? "나는 화면 정의서를 써." "화면 정의서가 뭔데?" "음... 앱 화면에 뭐가 있는지 정리하는 거." "그게 일이야?" 할 말이 없다.사수가 시키는 거 하는 건데 정확히는 사수가 준 업무를 한다. "이 기능 화면 정의서 써봐." "네." "이번 주 업데이트 내용 정리해." "네." "회의록 작성해." "네." 내가 기획한 게 아니다. 사수가 이미 방향 정했다. 나는 디테일만 채운다. 버튼 문구, 팝업 내용, 예외 상황 처리. 이런 것들. 기획자 맞나? 검색해봤다. "주니어 기획자 업무".상위 기획자의 지시에 따라 세부 기획 수행 회의록 작성 및 이슈 트래킹 화면 정의서, 플로우차트 작성맞긴 맞다. 근데 이게 자랑스럽게 말할 일인가? "나는 시키는 거 하는 사람이야." 이렇게 말하면 여자친구가 뭐라고 생각할까. 저번 주에 여자친구가 말했다. "우리 팀장님이 내 아이디어 채택했어. 이번 캠페인 메인 카피 내가 썼어." 나는 "대박"이라고만 했다. 부러웠다. 나는 언제 내 아이디어로 뭔가 해볼까.기획자가 뭐 하는 사람이에요? 면접 때도 물어봤다. 이 질문. 준비한 답이 있었다. "사용자 니즈를 파악해서 서비스를 설계하는 사람입니다." 합격했다. 지금 다시 물으면 못 대답한다. 사용자 니즈? 사수가 정한다. 데이터 보고 결정한다. 나는 그냥 따른다. 서비스 설계? 큰 틀은 이미 있다. 나는 세부만 채운다. 그럼 나는 뭐 하는 사람? 노션 문서 작성하는 사람. 피그마 컴포넌트 복붙하는 사람. 회의에서 받아적는 사람. 이게 기획자인가. 유튜브 봤다. "주니어 기획자의 하루". 다들 비슷하다. 사수 밑에서 배운다. 문서 작성한다. 회의 참석한다. 위안이 됐다.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 근데 여자친구한테 이렇게 말하면? "나는 아직 배우는 단계야. 사수 밑에서." 27살인데 아직 배우는 중. 자괴감 든다. 개발자가 "이거 안 돼요" 하면 제일 무서운 순간이다. 화면 정의서 다 썼다. 사수 검토 받았다. 개발팀 전달했다. 개발자가 메시지 보냈다. "신기획님, 이 기능은 구현 어려울 것 같은데요." 심장이 멈췄다. "아...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요?" "기획 다시 해주셔야죠." 대안이 없다. 왜 안 되는지 이해도 안 된다. 기술적으로 어렵다는데 뭐라고 반박하지? 사수한테 물었다. "이거 개발자가 어렵대요." "왜?" "기술적으로..." "구체적으로 뭐가 어렵다고?" 모른다. 안 물어봤다. "다시 물어봐." 개발자한테 다시 물었다. 설명 들었다. API 구조, DB 스키마, 캐싱 문제. 하나도 모르겠다. "아... 네. 그럼 제가 다시 기획해볼게요." 어떻게? 검색했다. "기획자 기술 지식". 다들 SQL 배우래. 개발 프로세스 이해하래. 주말에 SQL 강의 들었다. SELECT, WHERE, JOIN. 이해는 했다. 근데 실무에서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다. 여자친구가 물으면 뭐라고 하지? "나는 개발자랑 소통 잘 안 돼." 이렇게 말하면 무능해 보인다. 말 안 하는 게 낫다. 회의 때 고개만 끄덕였다 이번 주 회의. 신규 기능 논의. 팀장: "이 기능 어떻게 생각해요?" 디자이너: "UI 측면에서는..." 개발자: "기술적으로는..." 마케터: "유저 반응은..." 나: "..." 팀장이 날 봤다. "신기획님 생각은?" "아... 저는... 좋은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음... 사용자들이... 좋아할 것 같아서요." 팀장이 웃었다. "근거는?" "..." 사수가 끼어들었다. "제가 설명드리겠습니다." 창피했다. 회의 끝나고 사수가 말했다. "회의 전에 미리 생각 좀 해와." "네... 죄송합니다." "미안해하지 말고 준비해." 준비를 어떻게 하지? 데이터 봐야 한다는데 어떤 데이터? GA 보는 법도 잘 모른다. 유저 리서치 해야 한다는데 어떻게? 설문지 만드는 법도 모른다. 경쟁사 분석 해야 한다는데 뭘 봐야 하지? 그냥 앱 다운받아서 써보는 게 다인가?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여자친구 친구들 만난 적 있다. 다들 직장 얘기한다. "우리 팀장님이 내 제안 채택했어." "이번 프로젝트 내가 리드했어." "고객사 미팅에서 내가 발표했어." 나는? "회의에서 받아적었어." 말 안 했다. PRD 양식 찾아서 따라 썼는데 사수가 말했다. "다음 기능부터는 네가 PRD 작성해봐." "네." PRD가 뭔지 검색했다. Product Requirement Document. 제품 요구사항 문서. 양식 검색했다. 수십 개 나왔다. 다 달랐다.목적/배경 타겟 유저 핵심 기능 성공 지표 일정/리소스이런 항목들. 그럴듯했다. 따라 썼다. 목적: 사용자 편의성 향상 타겟 유저: 20~30대 여성 핵심 기능: 원클릭 구매 성공 지표: 구매 전환율 10% 상승 사수한테 보냈다. 피드백 왔다. "왜 사용자 편의성 향상이 목적이야? 비즈니스 목표는?" "왜 20~30대 여성이 타겟이야? 데이터 근거는?" "원클릭 구매가 왜 핵심 기능이야? 다른 대안은 검토했어?" "구매 전환율 10% 상승. 왜 10%야? 현재가 몇 %인데?" 대답 못 했다. 그냥... 다른 PRD 보고 비슷하게 썼다. 사수가 말했다. "양식 채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야. 왜 이걸 해야 하는지 설득하는 게 중요해." "네..." "다시 써봐. 이번엔 데이터부터 찾아보고." 데이터를 어디서 찾지? GA 열었다. 수치만 가득했다. 뭘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노션 검색했다. 과거 PRD 찾아봤다. 선배들이 쓴 거. 구조 분석했다. 아. 이렇게 쓰는 거구나. 다시 썼다. 3일 걸렸다. 사수: "나아졌네. 근데 여기 로직 좀 이상한데?" 또 수정. 이게 맞는 건가? 여자친구가 물으면? "나는 문서 쓰는데 시간 다 쓴다." 이렇게 말하면 한심해 보인다. 1년 뒤에도 이러고 있으면 무서운 생각이 든다. 지금 2년차. 3년차 되면 달라질까? 선배 기획자 봤다. 4년차. 여전히 사수한테 검토받는다. 여전히 회의에서 눈치 본다. 달라진 건? 문서 쓰는 속도. 그게 다. 10년차 기획자 링크드인 봤다. "주도적으로 프로덕트 방향 설정". 멋있다. 나는 언제 저렇게 되지? 유튜브에서 "시니어 기획자 vs 주니어 기획자" 봤다. 주니어: 화면 그린다. 문서 작성한다. 지시 받는다. 시니어: 방향 제시한다. 데이터 분석한다. 의사결정한다. 나는 주니어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토이 프로젝트 해본다. 주말에. "나만의 앱 기획하기". PRD 써본다. 화면 그려본다. 근데 이게 실무에서 통할까? 모르겠다. 확신이 없다. 여자친구한테 솔직하게 다음 주 만났다. 카페. 여자친구가 또 물었다. "요즘 일은 어때?" 이번엔 솔직하게 말했다. "잘 모르겠어. 나 지금 뭐 하는 사람인지." "무슨 소리야?" "회사 가면 바쁜데 남한테 설명 못 하겠어. 내가 기획한 것도 없고. 사수가 시키는 거 하고. 회의에서 할 말도 없고." 여자친구가 웃었다. 이번엔 진짜 웃음이었다. "나도 그래." "너도?" "1년차 때 그랬어. 나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겠고. 팀장님 시키는 것만 하고. 내 아이디어라고 할 것도 없고." "진짜?" "응. 근데 2년차 되니까 좀 보이더라. 내가 뭘 배우고 있는지." 위로가 됐다. "너 뭐 배우고 있는데?" "문서 쓰는 법. 개발자랑 대화하는 법. 데이터 보는 법. 회의에서 의견 내는 법." 맞다. 나도 배우고 있다. 당장 잘하는 건 아니지만. "그럼 너 지금 일 괜찮은 거야?" "응. 힘들긴 한데 배우는 중이야." 여자친구가 웃었다. "그렇게 말하면 되지." 그렇구나. "요즘 일은 어때?" "힘든데 배우는 중." 이렇게 대답하면 되는 거였다. 완벽하지 않아도. 뭔가 대단한 거 하지 않아도. 배우고 있으면 되는 거.말 못 하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 배우는 중이라고 말 못 하는 게 부끄러운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