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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팀
- 14 Dec, 2025
사수가 '잘했어'라고 한 말 한 달 버팀
사수가 '잘했어'라고 한 말 한 달 버팀 그날의 슬랙 메시지 오후 4시 32분. 슬랙 알림이 떴다. "신기획님, 이번 화면 정의서 잘했어요. 플로우 깔끔하네요." 사수였다. 세 번 읽었다. 네 번째는 소리 내서 읽었다. 다섯 번째는 스크린샷 찍었다. '잘했어요.' 입사 후 8개월. 처음 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이건 좀...' '이 부분 다시' '왜 이렇게 했어요?' 빼고는 처음이었다. 손이 떨렸다. 마우스 커서가 화면을 헤맸다. 옆자리 디자이너가 물었다. "왜 웃어요?" "아뇨." 웃고 있었다. 몰랐다.8개월의 무게 입사 첫날. 노션 계정 만들었다. 기획서 양식 받았다. 사수가 말했다. "일단 이것부터 따라 해봐요." 따라 했다. 2주 걸렸다. "이건 왜 이렇게 했어요?" "..." "다시 해봐요." 다시 했다. 1주 더. "음... 이 부분은..." 또 고쳤다. 3개월차. 회의록 담당이 됐다. 회의 내용 받아적기. 정리. 공유. "회의록은 잘하네요." 이게 칭찬인가 싶었다. 5개월차. 화면 정의서 처음 맡았다. 사수 기획서 열어서 구조 복사. 내용만 바꿨다. "이건 그냥 제 거 따라 한 거예요?" "...네." "본인 생각을 넣어야죠." 본인 생각이 뭔데. 나도 모르겠는데. 7개월차. 개발자 미팅에서 얼어붙었다. "이 플로우 말이 안 되는데요?" "아... 그게..." 사수가 대신 설명했다.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날 저녁. 화장실 거울 보면서 생각했다. '나 기획자 맞나.'그 화면 정의서 그 화면 정의서는 특별할 게 없었다. 회원가입 플로우. 누가 봐도 뻔한 거.이메일 입력 인증번호 발송 인증 확인 비밀번호 설정 완료다만 이번엔 좀 달랐다. 사수 기획서 안 봤다. 경쟁사 3개 가입해봤다. 어디서 막히는지 체크했다. 토스: 인증번호 자동 입력. 편하다. 당근: 재전송 버튼 위치 애매. 못 찾았다. 뱅크샐러드: 비밀번호 규칙 설명 친절. 좋다. 메모했다. 우리 서비스는 어떻게 할까. 40대 이상도 쓴다. 자동 입력 힘들면? 재전송 버튼은 크게. 비밀번호 규칙은 입력창 바로 아래. 플로우 그렸다. 예외 케이스 7개 추가. 에러 메시지도 썼다. "인증번호를 다시 확인해주세요." 아니다. 너무 딱딱하다. "앗, 인증번호가 일치하지 않아요. 다시 입력해주세요!" 이것도 오글거린다. "인증번호를 확인해주세요 :)" 이모티콘은 좀... 결국 첫 번째로 돌아갔다. 명확한 게 낫다. 3일 걸렸다. 사수한테 보냈다. 답장이 없었다. 6시간 후에 왔다. "잘했어요." 그 말. 한 달의 연료 그 말로 한 달을 버텼다. 진짜다. 다음 주. 개발자가 물었다. "이 버튼 위치, 왜 여기예요?" 전엔 얼어붙었다. 이번엔 달랐다. "사용자 테스트 3건 봤는데요, 오른쪽 하단보다 중앙 하단이 인식률이 높았어요." 거짓말이다. 테스트 안 했다. 경쟁사 분석한 거다. 그래도 개발자가 고개 끄덕였다. "아 그렇구나. 알겠습니다." 이겼다. 작은 승리. 2주 차. 회의에서 의견 냈다. "이 기능, 우선순위 낮춰도 될 것 같은데요. 사용자 니즈가..." 말이 나왔다. 떨렸지만 끝까지 했다. 팀장이 물었다. "근거는?" "GA 데이터 보니까 이 페이지 체류 시간이 평균 8초예요. 읽지도 않고 넘어가요." 준비했다. 어젯밤에 GA 2시간 봤다. 팀장이 웃었다. "오케이. 다음 스프린트로 미뤄요." 내 의견이 반영됐다. 처음이었다. 3주 차. 후배가 들어왔다. 나보다 어렸다. "선배님, 화면 정의서 어떻게 써요?" 선배님. 나를 선배님이라고 불렀다. "일단 경쟁사부터 써봐. 3개 이상." 사수가 내게 안 알려준 방법을 알려줬다. 내가 혼자 깨달은 것. "네!" 후배가 고개 숙였다. 이상했다. 좋았다. 4주 차. 사수가 또 물었다. "신기획님, 이번 기획서 일정 어때요?" "3일이면 될 것 같아요." "이유는?" "이번 건 신규 플로우가 아니라 개선이잖아요. 기존 문서 베이스로 수정하면 빠를 것 같아요." 사수가 웃었다. "맞네요. 그럼 부탁해요." 부탁. 지시가 아니라 부탁이었다.왜 이렇게까지 왜 한 마디에 이렇게까지 흔들렸을까. 생각해봤다. 8개월 동안 나는 내가 뭘 하는지 몰랐다. 회의록 쓰고, 화면 그리고, 피드백 받고, 고치고. 이게 맞나. 틀렸나. 몰랐다. 기준이 없었다. 정답이 없었다. 사수 말이 정답이었다. "이건 아니에요." → 아니구나. "다시 해봐요." → 틀렸구나. 틀린 것만 배웠다. 맞는 건 몰랐다. 그러다 처음 들었다. "잘했어요." 아. 이게 맞는 거구나. 그 순간 좌표가 생겼다. 북극성 같은 거. '이 방향이 맞아.' 그래서 그렇게 기뻤던 거다. 방향을 알았으니까. 그리고 또 하나. 인정받고 싶었다. 기획자로서가 아니라. 일하는 사람으로서. '이 사람 괜찮네.' '좀 하네.' '제대로 배우고 있어.' 그런 거. 비전공 출신이다. CS 모른다. SQL 못 한다. 디자인 못 한다. 개발 모른다. 그냥 열심히 할 줄만 안다. 그래서 열심히 했다. 경쟁사 분석하고, GA 보고, 사수 기획서 읽고, 유튜브 강의 들었다. 인정받고 싶었다. '신기획, 쟤 괜찮아.' 그 한 마디가 그걸 줬다. 그래서 한 달을 버텼다. 지금 오늘도 출근했다. 사수가 슬랙 보냈다. "신기획님, 이번 기획서 좀 아쉬운데요. 케이스 하나 빠뜨렸어요." 웃었다. "아 진짜네요. 오후에 수정할게요." 안 무너졌다. 한 달 전 같았으면 하루 종일 우울했을 거다. 이젠 안다. 틀려도 괜찮다. 고치면 된다. 한 번 잘하면, 또 잘할 수 있다. 그 '잘했어요' 한 마디가 증명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걸. 그래서 오늘도 기획서 연다. 또 틀릴 거다. 또 고칠 거다. 언젠가 또 들을 거다. "잘했어요." 그때까지.작은 칭찬 하나. 생각보다 오래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