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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 반에 나가면서 하는 죄책감

7시 반에 나가면서 하는 죄책감

7시 28분 책상 정리한다. 노션 창 닫고, 슬랙 상태 "자리비움" 설정. 가방에 노트북 넣는다. 지퍼 소리 최대한 작게. 고개 들어 주위 본다. 사수는 화면 두 개 켜놓고 뭔가 타이핑 중. 팀장은 회의실에서 통화한다. 개발자 두 명은 헤드폰 끼고 코딩. 10시 출근이다. 정시 퇴근은 7시. 지금 7시 28분. 30분 야근한 셈이다. 그런데 왜 죄책감이 드나.일어서는 순간 의자 뒤로 민다. 삐걱 소리. 사수가 고개 든다. "먼저 가요?" "아, 네. 수고하셨습니다." "응, 들어가." 사수는 다시 화면 본다. 나는 웃으면서 고개 숙인다. 속으로 센다. 3초. 돌아선다. 복도 나오면서 생각한다. '들어가'는 뭔가. '가'도 아니고. 배려인가, 눈치인가. 모르겠다. 엘리베이터 기다린다. 1층에서 올라온다. 느리다. 뒤에서 문 여는 소리. 심장 뛴다. 다른 팀 사람이다. 인사한다. 지하철 안 7호선 타고 집에 간다. 40분 걸린다. 의자 앉는다. 폰 꺼낸다. 슬랙 확인. 사수가 DM 보냈다. "내일 오전에 이거 같이 보자" 파일 첨부. 열어본다. 내가 오늘 쓴 화면 정의서. 빨간 줄 가득. 한숨 나온다. 7시 반에 나온 게 미안해진다. 30분 더 있었으면 오늘 끝낼 수 있었나. 아니다. 사수도 7시 반에 이거 본 건 아니다. 아마 8시쯤? 창밖 본다. 어둡다. 12월이라 5시부터 어둡다. 퇴근길은 항상 밤이다.선배 말 입사 첫 달. 선배가 말했다. "여기 10시 출근이야. 그러니까 7시 퇴근해도 돼. 눈치 보지 마." 고마웠다. 진짜 7시에 나갔다. 일주일. 그다음 주. 선배가 물었다. "요즘 7시에 나가?" "네, 괜찮다고 하셔서요." "아, 응. 괜찮아. 근데 다들 8시쯤 나가긴 하거든." 그 뒤로 7시 반에 나간다. 애매한 시간이다. 정시보단 늦고, 팀 평균보단 이르다. 사수는 사수는 8시 반에 나간다. 매일. 비 와도, 눈 와도. 10시 출근이니까 10시간 반 일한다. 한 번 물어봤다. "형, 왜 매일 8시 반이에요?" "응? 그냥. 할 거 하다 보면 그렇게 돼." 할 거. 나도 할 거 많다. 근데 8시 반까지는 못 남는다. 집에 가고 싶다. 여자친구 보고 싶다. 유튜브 보고 싶다. 사수는 미혼이다. 혼자 산다. 집에 가도 할 거 없다고 했다. 그래서 회사에 있는다고. 나는 다르다. 집에 할 거 많다. 빨래, 설거지, 유튜브, 여자친구 전화, 토이 프로젝트. 근데 회사 일이 우선 아닌가.팀장은 팀장은 9시에 나간다. 가끔 10시. 회의 때 말한다. "다들 일찍 퇴근하세요. 워라밸 중요해요." 근데 본인은 9시에 나간다. 모순이다. 아니면 9시가 일찍인가. 한 번 7시에 나가려고 했다. 팀장이 불렀다. "신기획님, 잠깐만요." 순간 식은땀. "네." "이거 내일까지 부탁해요. 급한 거라." "알겠습니다." 그날 8시 반에 나갔다. 급한 거였다. 어쩔 수 없다. 근데 다음 날. 그 자료 회의에서 안 쓰였다. 급한 게 아니었나. 모르겠다. 개발팀은 개발자들은 7시에 나간다. 칼퇴. 눈치 안 본다. 부럽다. 왜 기획자는 못 나가나. 개발자 선배한테 물어봤다. "형들은 왜 칼퇴 가능해요?" "우리? 코드 짜는 게 있으면 내일 하면 되잖아. 머리 아프면 더 오래 걸려." 맞는 말이다. 근데 기획도 마찬가지 아닌가. 머리 아프면 기획도 이상해진다. 차이는 이거다. 개발은 "내일 하면 돼"가 통한다. 기획은 "오늘 해야 돼"가 많다. 왜? 기획이 늦으면 개발이 늦는다. 개발이 늦으면 출시가 늦는다. 그래서 기획은 항상 쫓긴다. 여자친구 말 여자친구는 마케터다. 6시 퇴근. 진짜 6시에 나온다. 통화한다. 7시 반쯤. "오빠 퇴근?" "응, 지금 지하철." "오늘도 야근?" "야근까진 아니고." "7시 반이면 야근이지." 말문 막힌다. 맞다. 7시 반은 야근이다. 30분. 근데 회사에선 야근이 아니다. "거기 왜 그래? 10시 출근인데." "다들 이렇게 있어." "그럼 오빠만 먼저 나오면 안 돼?" "음..." 안 된다는 건 아니다. 근데 안 된다. 왜? 모르겠다. 분위기? 분위기란 분위기는 룰이 아니다. 근데 룰보다 강하다. 회사 공식 퇴근은 7시. 근데 실제 퇴근은 8시. 누가 정한 건 아니다. 그냥 다들 그렇게 한다. 7시에 나가면 뭐라고 하나? 아니다. 아무도 뭐라 안 한다. 그게 더 무섭다. 칼퇴하는 직원한테 뭐라고 하는 회사. 그건 나쁜 회사다. 명확하다. 칼퇴해도 아무 말 없는데, 왠지 눈치 보이는 회사. 이게 더 애매하다. 나쁜 건 아니다. 근데 좋은 것도 아니다. 죄책감의 정체 7시 반에 나간다. 왜 죄책감이 드나. 일을 덜 해서? 아니다. 9시간 반 일했다. 충분하다. 사수가 뭐라고 해서? 아니다. 사수는 "들어가" 했다. 팀 분위기? 이게 맞다. 다들 8시 넘어 나가는데, 나만 7시 반. 이 차이. 30분이다. 겨우 30분. 근데 이 30분이 크다. 30분 더 있으면: 화면 정의서 한 장 더. 회의록 정리. 내일 할 일 미리 보기. 30분 일찍 나오면: 지하철 덜 붐빔. 집에 일찍 도착. 개인 시간 확보. 어느 게 맞나. 모르겠다. 2년 차 선배 2년 차 선배 있다. 나보다 1년 빠르다. 그 선배가 말했다. "나도 1년 차 땐 눈치 봤어. 7시에 못 나갔어." "지금은요?" "지금? 7시 10분에 나가. 딱 10분만 눈치 본다." 웃겼다. 근데 공감됐다. "형, 언제부터 괜찮아졌어요?" "음. 일 잘하면 괜찮아져." 일을 잘하면. 그럼 나는 아직 일을 못하나. 맞다. 사수한테 빨간 줄 받는다. 아직 멀었다. 결국 실력이다. 실력 있으면 7시에 나가도 뭐라 안 한다. 실력 없으면 8시에 나가도 눈치 보인다. 내일은 내일도 7시 반에 나갈 것이다. 모레도. 계속. 언젠간 7시에 나가고 싶다. 떳떳하게. 죄책감 없이. 그러려면 일을 잘해야 한다. 빨간 줄 덜 받아야 한다. 사수한테 "이거 괜찮은데?" 들어야 한다. 그때까지는 7시 반. 애매한 시간. 야근도 아니고, 칼퇴도 아닌. 근데 괜찮다. 1년 차니까. 배우는 중이니까.7시 28분. 가방 챙긴다. 내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