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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자는 뭐 하는 사람이에요?'라는 질문에 1년 뒤에도 못 답할 것 같은 불안감

'기획자는 뭐 하는 사람이에요?'라는 질문에 1년 뒤에도 못 답할 것 같은 불안감

친구가 물었다 "너 회사에서 뭐 해?" 어제 대학 동기 만났다. 술 한 잔 걸치고 나니까 이 질문이 나왔다. "응... 기획자야." "기획자? 그게 뭔데?" 멈췄다. 입이 안 열렸다. "그냥... 서비스 기획을 하는 거지." "아니 그게 뭔데? 구체적으로." 모르겠다. 진짜로. 2년 차인데 설명을 못 한다. 개발자는 코딩한다. 디자이너는 그린다. 마케터는 광고한다. 나는? 회의록 쓴다. 화면 정의서 그린다. 피드백 받는다. 이게 기획인가?월요일 아침 출근했다. 노션 켰다. 사수가 남긴 코멘트: "이 화면 플로우 다시 생각해봐요. 사용자 입장에서 불편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근데 뭐가 불편한 건데? 30분 동안 화면만 봤다. 모르겠다. 검색했다. "화면 플로우 설계 방법". 나오는 건 다 안다. "사용자 관점에서", "직관적으로", "단계를 줄여라". 안다고. 근데 어떻게? 결국 비슷한 서비스 10개 열어서 봤다. 카카오는 이렇게 했네. 토스는 저렇게 했네. 그래서 나는? 베끼는 것도 아니고. 분석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보기만 한다. 점심시간. 개발자 선배가 물었다. "신기획님, 이 기능 왜 필요한 거예요?" "아... 그게... 사용자들이 불편해할 것 같아서요." "어떤 데이터 보고 판단하신 거예요?" 데이터. 없다. "일단... 사수님이 필요하다고 해서요." 말하고 나서 창피했다. 선배는 그냥 웃었다. 기획자가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내가 하는 일 오늘 한 일 정리해봤다. 오전 10시: 출근. 사수 피드백 확인. 오전 10시 30분: 화면 정의서 수정. 오전 11시: 회의. 개발팀이랑 디자인팀이랑. 오후 12시: 회의록 작성. 오후 1시: 점심. 오후 2시: PRD 수정. 사수 검토 요청. 오후 3시: 피드백 받음. 다시 수정. 오후 4시: 데이터팀한테 질문 보냄. "이 지표 어떻게 확인하나요?" 오후 5시: QA 시트 작성. 오후 6시: 내일 할 일 정리. 오후 7시 30분: 퇴근. 이게 기획인가? 서류 작성인가? 회의록 작성자인가? 개발자는 코드를 친다. 화면에 뭔가 만들어진다. 디자이너는 그린다. 예쁜 게 나온다. 나는? 문서만 쌓인다. 노션 페이지만 늘어난다.사수한테 물어봤다 용기 냈다. 물어봤다. "팀장님, 저 질문 있는데요." "응, 말해봐." "기획자는... 정확히 뭐 하는 사람인가요?" 사수가 웃었다. 비웃는 게 아니라 그냥. "나도 2년 차 때 그 고민했어." "그럼... 답은 뭔가요?" "답은 없어. 근데 내가 생각하는 건,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 방법을 찾는 사람?" 또 이런 추상적인 답. "그럼 팀장님은 어떻게 일하세요?" "나는... 일단 왜 이게 필요한지부터 생각해. 그 다음에 사용자가 뭘 불편해하는지. 그 다음에 우리가 뭘 할 수 있는지." 알겠다. 그래서? "근데 신기획씨는 지금 뭐가 제일 답답해?" "제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문서만 쓰는 것 같고." "그건 주니어 때 다 그래. 일단 문서 쓰는 법부터 배워야 하니까." 위로인지 현실인지 모르겠다. "1년 뒤에도 이럴까요?" "노력하면 달라지겠지. 안 하면 그대로고." 뭔가 찝찝했다. 퇴근길 지하철 탔다. 유튜브 켰다. "PM 되는 법", "기획자 역량", "주니어 기획자 성장". 영상 10개 봤다. 다 비슷하다. "사용자 관점을 가져라", "데이터를 보라",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키워라". 안다. 알아. 근데 어떻게? 사용자 관점. 나도 사용자인데 내 불편함은 회사가 안 중요하대. 데이터. SQL 모르는데 어떻게 봐? 커뮤니케이션. 회의 때 입도 못 열어. 집 도착했다. 원룸. 50만원. 노트북 켰다. 토이 프로젝트 기획서. "가상의 배달앱 기획서". 3주째 첫 페이지. 문제 정의부터 막힌다. "사용자들은 배달앱에서 무엇을 불편해할까?" 모르겠다. 나는 불편한 게 없는데. 검색했다. "배달앱 불편한 점". 나오는 대로 적었다. 이게 기획인가? 복붙인가? 노트북 껐다. 침대에 누웠다. 천장만 봤다. 1년 뒤 상상해봤다. 1년 뒤. 친구가 또 물어본다. "너 뭐 하는 사람이야?" 나는 또 말한다. "그냥... 기획자야." "그래서 뭐 하는데?" 또 막힌다. 또 설명 못 한다. 3년 차가 돼도 이러면 어떡하지. 개발자는 포트폴리오에 코드 올린다. 디자이너는 비핸스에 작품 올린다. 나는? 회의록 올리나? PRD 올리나? 회사 기밀이라 못 올린다. 그럼 뭘로 증명하지? 내가 성장했다는 걸. 무섭다. 지금 열심히 하는 게 맞는 건가? 아니면 방향이 틀린 건가? 회의록 잘 쓰는 게 성장인가? 화면 정의서 예쁘게 그리는 게 성장인가? 모르겠다. 그래도 어제 있었던 일. 개발자 선배가 말했다. "신기획님이 정리한 화면 플로우, 생각보다 괜찮던데요?" "진짜요?" "응. 예외 케이스까지 생각한 거 보고 좀 놀랐어요." 그 말 듣고 하루종일 기분 좋았다. 사수가 말했다. "요즘 회의록 잘 쓰네. 액션 아이템 정리가 깔끔해." 별것 아닌데 기뻤다. 여자친구가 말했다. "너 요즘 일 얘기할 때 재밌어 보여." 그런가? 잘 모르겠다. 내가 성장하는 건지. 근데 한 가지는 안다. 작년보다는 낫다는 거. 작년엔 PRD가 뭔지도 몰랐다. 지금은 쓴다. 작년엔 회의 때 받아적기만 했다. 지금은 가끔 질문한다. 작년엔 사수한테 질문도 못 했다. 지금은 묻는다. 느린 거 안다. 답답한 거 안다. 근데 멈춘 건 아니다. 오늘도 출근한다. 노션 연다. 사수 피드백 확인한다. 수정한다. 회의 들어간다. 받아적는다. 화면 정의서 그린다. 검토받는다. 이게 기획인가? 아직도 모르겠다. 근데 계속한다. 1년 뒤에도 이 질문에 못 답할 수도 있다. "기획자는 뭐 하는 사람이에요?" 괜찮다. 3년 뒤엔 답할 수 있을지도. 아니면 5년 뒤. 지금은 모르는 게 당연한 거다. 2년 차니까. 배우는 중이니까."기획자가 뭐냐고? 글쎄. 아직 배우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