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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차에서

인턴 기획자였던 나, 2년차에서 멈춘 느낌

인턴 기획자였던 나, 2년차에서 멈춘 느낌

인턴 기획자였던 나, 2년차에서 멈춘 느낌 1년차는 달랐다 입사 첫날을 기억한다. 사수가 건넨 기획서를 열었다. 아무것도 몰랐다. "와이어프레임", "유저플로우", "MVP". 단어 하나하나가 외계어였다.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매일 배울 게 있었다. 사수 기획서를 복사해서 내 노션에 붙여놓고 구조를 분석했다. "아, 이렇게 페이지를 나누는구나." "요구사항을 이런 식으로 정리하네." 3개월 차에는 간단한 화면 정의서를 혼자 썼다. 사수가 "잘했어"라고 했다. 그날 저녁 여자친구한테 자랑했다. "나 오늘 칭찬받았어." 6개월 차. 회의에서 처음으로 의견을 냈다. "이 버튼 위치, 사용자 동선상 여기가 나을 것 같습니다." 떨렸지만 말했다. 개발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낫겠네요."9개월 차에는 작은 기능 하나를 처음부터 끝까지 기획했다. 요구사항 정리부터 화면 정의서, 개발 QA까지. 내가 기획한 게 실제 서비스에 들어갔다. 앱을 켜서 그 화면을 봤다. 뿌듯했다. 1년 차 연말. 연봉 재계약 면담에서 대표가 말했다. "많이 성장했어요. 내년에도 잘 부탁합니다." 집에 오는 길에 편의점에서 맥주를 샀다. 혼자 마시면서 생각했다. "나 잘하고 있네." 그때는 몰랐다. 이게 끝이라는 걸. 2년차부터 뭔가 이상했다 2년 차 3개월. 오늘도 화면 정의서를 쓴다. 1년 전에 쓴 것과 똑같은 구조다. 로그인 화면, 회원가입 화면, 메인 화면. 버튼 위치만 조금 다르다. 사수가 말한다. "이번엔 결제 플로우 기획해봐." 지난번에 했던 거랑 거의 같다. 템플릿 복사해서 내용만 바꿨다. 2시간 걸렸다. 1년 전 같으면 이틀은 걸렸을 일이다. "빨라졌네"라고 생각했다. 근데 왜 기분이 안 좋을까. 회의 시간. PM이 묻는다. "이 기능, 어떻게 생각해?" 1년 전 같으면 떨면서 대답했을 텐데. 지금은 그냥 나온다. "UI는 기존 패턴 따라가고요, 개발 공수 고려하면 이렇게 하는 게 낫습니다." 정답이다.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내 입에서 나온 말인데 내가 놀라지 않는다. 1년 전에 사수가 하던 말이다. 내가 따라한 거다.저녁. 노션 정리하다가 1년 전 내가 쓴 글을 봤다. "오늘 처음으로 API 명세서를 이해했다. 어렵지만 재밌다." 지금은? API 명세서 보면 그냥 안다. 어떻게 동작할지, 어디서 막힐지. 근데 재밌지 않다. 내가 한계에 도달한 건가 주말. 여자친구가 묻는다. "요즘 힘들어 보여."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힘든 건 아니다. 야근도 별로 없고, 사수도 잘해준다. 그냥 멈춘 느낌이다. 토이 프로젝트 기획서를 켰다. 2주째 첫 페이지에서 못 나가고 있다. "뭘 기획하지?" 아이디어가 안 난다. 1년 전에는 아이디어가 넘쳤는데. 아니다. 정확히는 아이디어가 나오다가 지워진다. "이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이미 있는 서비스인데." "이렇게 하면 개발이 너무 오래 걸릴 텐데." 머릿속에서 사수 목소리가 들린다. "현실적으로 생각해야지." 맞는 말이다. 근데 이게 맞나. 링크드인을 켰다. 같이 입사한 동기가 글을 올렸다. "새로운 프로젝트 런칭했습니다!" 사진에 그가 웃고 있다. 팀원들과 함께. 나는? 오늘 뭐 했지. 화면 정의서 3개 썼다. 다 비슷한 내용이다. 선배들한테 물어봤다 용기 내서 사수한테 물었다. "저 요즘 성장이 안 되는 것 같아요." 사수가 웃는다. "다들 그래. 2년차 때 한 번씩 겪어." 그리고 말한다. "근데 지금이 중요해. 기초를 다지는 시기거든." 기초? 1년 동안 다진 거 아닌가. 더 다져야 하나. 다른 팀 선배한테도 물었다. 5년차 기획자다. "저도 그랬어요. 근데 3년차 되니까 또 달라지더라고요." 3년차? 1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건가. 퇴근길에 유튜브를 봤다. "주니어 기획자 성장 로드맵" 영상이다. 댓글을 읽었다. "저도 2년차인데 공감돼요." "3년차도 마찬가지입니다." "5년차인데 아직도..." 아, 다들 그렇구나. 근데 위로가 안 된다.반복이 나쁜 건 아니다 어제 회사에서 큰 버그가 났다. 결제 기능이 멈췄다. 개발팀이 난리다. PM이 회의실로 불렀다. "원인 파악하고 대응 방안 기획해줘." 1년 전 같으면 패닉했을 것이다. 근데 지금은 알고 있다. 뭘 해야 하는지. 30분 만에 문서를 만들었다. 버그 발생 시나리오, 영향 범위, 임시 조치, 근본 해결 방안. 개발팀장이 말한다. "역시 신기획씨는 빨라." 그날 저녁 생각했다. 내가 빨라진 이유는? 반복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상황을 여러 번 겪었기 때문이다. 반복이 나쁜 건 아니구나. 문제는 반복만 하고 있다는 거다. 같은 레벨의 일만 계속한다. 어제와 같은 오늘, 오늘과 같은 내일. 1년 전에 배운 걸 2년째 쓰고 있다. 새로 배운 건? 딱히 없다. 정체기가 아니라 안전지대였다 주말에 도서관에 갔다. 기획 책을 빌렸다. 『린 스타트업』, 『인스파이어드』. 1년 전에 샀다가 반만 읽고 덮은 책들이다. 다시 펼쳤다. 이번엔 다르게 읽혔다. "아, 우리 회사에서 이거 안 하고 있네." "이 방법론, 우리한테 필요한데." 근데 회사에서 제안할 수 있을까? 사수가 "그건 너무 이상적이야"라고 하면? PM이 "시간 없어"라고 하면? 결국 안 한다. 책을 덮는다. "나중에 해야지." 1년 전에도 그렇게 말했다. 월요일 아침. 출근해서 노션을 켰다. 할 일 리스트가 똑같다. "화면 정의서 작성", "회의록 정리", "개발 QA". 손이 알아서 움직인다. 클릭, 타이핑, 저장. 2시간 만에 끝났다. 효율적이다. 근데 이게 성장인가? 깨달았다. 나는 정체기에 있는 게 아니다. 안전지대에 있는 거다. 실수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사수한테 혼나지 않는 선에서. 편하게 할 수 있는 것만 하고 있다. 작은 불편함을 선택하기 화요일. 회의에서 PM이 물었다. "이 기능, 어떻게 할까?" 평소 같으면 안전한 답을 했을 것이다. "기존 방식대로 하는 게 낫습니다." 근데 이번엔 다르게 말했다.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보면 어떨까요?" 떨렸다. PM이 묻는다. "어떤 방식?" 준비한 게 없었다. 주말에 본 책 내용을 떠올렸다. "A/B 테스트를 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두 가지 버전을 만들어서 사용자 반응을 보는 거죠." 개발자가 말한다. "공수가 두 배 드는데요." 예상한 반응이다. 근데 물러서지 않았다. "초기 공수는 들지만, 데이터 기반으로 결정할 수 있잖아요. 나중에 다시 뒤집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요?" 팀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한번 해보자." 회의가 끝났다. 심장이 뛴다. 1년 만이다. 이런 느낌. 퇴근 후 집에 와서 A/B 테스트 방법론을 공부했다. 모르는 게 많다. 어렵다. 근데 재밌다. 이거다. 이 느낌. 1년 전에 느꼈던 거. 멈춘 게 아니라 쉬고 있었던 거다 목요일. A/B 테스트 기획안을 만들었다. 처음 하는 거라 시간이 오래 걸렸다. 3일 동안 매일 야근했다. 사수한테 보여줬다. 피드백이 많이 나왔다. "이 부분은 측정이 어려울 것 같은데." "여기는 좀 더 구체적으로 써야 해." 1년 전 같으면 기죽었을 것이다. 근데 지금은 다르다. "알겠습니다. 수정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수정했다. 금요일. 수정한 기획안을 다시 보여줬다. 사수가 말한다. "많이 좋아졌네. 이렇게 하면 될 것 같아." 개발팀 회의. 내가 발표했다. "이번 기능은 A/B 테스트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화면을 넘기면서 설명했다. 개발자들이 질문한다. 대답한다. 모르는 건 "확인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한다. 회의 후 개발팀장이 말했다. "신기획씨, 요즘 달라진 것 같아요." 뭐가 달라졌을까. 내가 봐도 모르겠다. 주말. 여자친구가 말한다. "요즘 표정이 좋아졌어." 그래? "응, 한동안 우울해 보이더니." 그날 밤 일기를 썼다. "2년차에서 멈춘 줄 알았다. 근데 멈춘 게 아니었다. 쉬고 있었던 거다. 다음 단계로 가기 전에." 2년차는 끝이 아니다 월요일 아침. 출근했다. 할 일 리스트를 봤다. "A/B 테스트 결과 분석", "다음 실험 설계". 새로운 일이다. 어렵다. 모르는 게 많다. SQL 공부해야 한다. 통계도 봐야 한다. 근데 겁나지 않는다. 1년 전에도 다 몰랐다. 그래도 배웠다. 이번에도 배우면 된다. 사수가 말한다. "신기획씨, 이번 분기 목표 얘기 좀 하자." 면담실로 갔다. 사수가 묻는다. "어떤 걸 배우고 싶어?" 1년 전 같으면 "시키는 거 하겠습니다"라고 했을 것이다. 근데 이번엔 준비했다. "데이터 분석 공부하고 싶어요. 그리고 실험 설계 방법론도요." 사수가 웃는다. "좋아. 지원해줄게." 퇴근길. 지하철에서 링크드인을 켰다. 동기가 또 글을 올렸다. 부럽지 않았다. 나도 내 속도로 가고 있으니까. 집에 와서 노트북을 켰다. SQL 강의를 재생했다. 어렵다. 근데 할 만하다. 2년 차는 끝이 아니었다. 중간 지점이었다. 1년 동안 배운 걸 내 것으로 만드는 시기. 그리고 다음을 준비하는 시기. 멈춘 게 아니라 숨을 고르고 있었던 거다. 다음 언덕을 오르기 전에.2년차 정체기는 끝이 아니라 쉼표였다. 이제 다음 문장을 쓸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