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션 회의록을 20번 고쳐 보낸 밤 11시
- 03 Dec, 2025
노션 회의록을 20번 고쳐 보낸 밤 11시
7시 반 퇴근, 9시 다시 켰다
퇴근했다. 집에 왔다. 씻었다.
그런데 계속 생각났다. 오후에 쓴 회의록.
“제가 정리해서 공유드리겠습니다.”
이 문장이 너무 형식적이지 않나. 딱딱하지 않나. 사수가 보면 ‘얘 또 인터넷에서 베꼈네’ 생각하지 않을까.
노트북 다시 켰다. 노션 들어갔다.
회의록 페이지 열었다. 오후 5시에 공유한 거.
아직 아무도 안 봤다. 조회수 1. 나.

문제는 어투였다
회의록을 다시 읽었다.
## 논의 사항
- A안 vs B안 검토
- 개발 일정 조율
- 다음 주 프로토타입 공유
## 결정 사항
- A안으로 진행
- 개발팀 검토 후 재논의
## 액션 아이템
- 기획서 수정: 신기획 (1/15까지)
- 디자인 시안: 최디자이너 (1/17까지)
이게 맞나.
“논의 사항”이 맞나 “논의사항”이 맞나. 띄어쓰기.
검색했다. 국립국어원. “논의 사항”이 맞대.
그럼 “결정사항”도 띄어야 하나. 수정했다.

20번의 수정
9시 10분. 첫 수정.
“제가 정리해서” → “정리해서”
너무 낮춘 것 같아서. 팀 막내지만 이 정도는 괜찮지.
9시 15분. 두 번째 수정.
“정리해서” → “제가 정리해서”
아니다. 선배들한테는 낮춰야지.
9시 20분. 세 번째.
표 구조를 바꿨다. 칼럼을 3개에서 4개로.
| 항목 | 내용 | 담당자 | 기한 |
이게 더 깔끔해 보인다.
9시 30분. 네 번째.
아니다. 4개는 너무 많다. 3개로 복구.
| 항목 | 담당자 | 기한 |
“내용”은 항목에 포함하면 되니까.
9시 40분부터 10시까지.
다섯 번째부터 열두 번째 수정.
- 이모지 추가 (📌, ✅, 📝)
- 이모지 삭제 (너무 가볍나)
- 소제목 폰트 변경 (Heading 2 → Heading 3)
- 다시 복구 (Heading 2가 맞다)
- 들여쓰기 조정
- 불릿 스타일 변경 (• → -)
- 다시 복구 (•가 낫다)
- 날짜 형식 (1/15 → 01/15 → 1월 15일)
정신없다.
그런데 멈출 수가 없다.
문장 하나의 무게
10시 10분.
“제가 정리해서 공유드리겠습니다.”
이 문장을 또 본다.
문제가 뭔지 알았다. “드리겠습니다”가 문제다.
너무 형식적이다. 회사 공문 같다.
“제가 정리해서 공유할게요.” 이게 낫나.
아니다. 너무 가볍다. 우리 팀은 존댓말 쓴다.
“제가 정리해서 공유하겠습니다.” 이건 어떤가.
“드리겠습니다”랑 “하겠습니다”의 차이.
검색했다. 네이버 지식인. 회사 커뮤니티.
답은 없다. 다 케바케래.

사수는 이런 거 안 하나
사수 회의록을 열어봤다.
지난주 회의록. 사수가 쓴 거.
## 논의
- XX 기능 추가 검토
- 일정 조정 필요
## 결정
- 일단 고
## TODO
- 기획서: 나 (D-3)
- 검토: 개발팀
엄청 간단하다.
“일단 고”라니. 이게 되네.
나는 왜 못 하지.
“제가 정리해서 공유드리겠습니다” 이런 거 안 쓴다. 사수는.
페이지 하단에 댓글도 없다.
조회수 12. 다들 본다. 아무 말 없다.
내 회의록은.
조회수 1. 아직도 나.
열세 번째부터 스무 번째
10시 40분.
“공유드리겠습니다” → “공유하겠습니다”
확정했다. 이걸로 간다.
10시 45분.
“공유하겠습니다” → “공유드릴게요”
아니다. 중간이 낫다.
10시 50분.
페이지 상단 커버 이미지를 바꿨다.
노션 기본 이미지. 파란색 그라데이션.
11시.
커버 이미지 삭제. 없는 게 깔끔하다.
11시 5분.
제목을 바꿨다.
“1/10 서비스기획 회의록” → “서비스기획 회의_25.01.10”
날짜 형식을 뒤로.
11시 7분.
다시 복구. 앞에 있는 게 낫다.
11시 10분.
마지막 수정.
맨 아래 한 줄 추가했다.
“추가 의견 있으시면 댓글 부탁드립니다.”
쓰고 지웠다. 쓰고 지웠다.
결국 남겼다.
저장했다. 페이지 닫았다.
11시 15분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 들었다. 노션 앱 켰다.
회의록 다시 확인했다.
조회수 1.
“추가 의견 있으시면 댓글 부탁드립니다.”
이 문장이 또 신경 쓰인다.
너무 형식적이지 않나.
“의견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이게 낫나.
노트북 다시 킬까.
아니다.
핸드폰으로 수정했다. 스물한 번째.
“의견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
이모티콘까지 넣었다.
저장했다.
페이지 닫았다.
3초 뒤 다시 열었다.
이모티콘 지웠다. 너무 가볍다.
스물두 번째 수정.
왜 이러나
11시 반.
불 껐다. 눈 감았다.
그런데 잠이 안 온다.
회의록이 계속 생각난다.
내일 아침에 사수가 본다.
댓글 달까. “수고했어요” 할까.
아니면 “이거 수정해” 할까.
“신기획님 회의록은 너무 딱딱해요.” 이럴까.
상상하니까 심장 뛴다.
내일 아침 출근하면.
노션 알림 확인부터 할 거다.
조회수 몇 개 찍혔나.
댓글 달렸나.
사수가 이모지 반응 남겼나. 👍
아무것도 없으면.
그것도 불안하다.
다들 안 본 건가. 링크를 잘못 보낸 건가.
1년 차의 밤
침대에서 일어났다. 11시 50분.
노트북 켰다.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회의록 괜찮다. 이제 괜찮다.
20번 넘게 고쳤으니까.
사수가 뭐라고 하면.
“네 수정하겠습니다” 하면 된다.
어차피 또 고칠 거다.
회의록 쓸 때마다 이런다.
기획서 쓸 때도 이런다.
슬랙 메시지 보낼 때도 이런다.
“확인 부탁드립니다.”
“확인 부탁드려요.”
“확인 부탁드릴게요.”
매번 고민한다.
1년 뒤에는 안 그럴까.
2년 차 되면 “일단 고” 이렇게 쓸 수 있을까.
모르겠다.
노트북 닫았다. 불 껐다.
조회수 1.
내일이면 오르겠지.
야 11시에 회의록 스무 번 넘게 고쳤다. 내일 사수가 “ㅇㅇ” 이러고 넘어가면 허무할 거다. 그래도 또 고칠 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