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서 양식 검색은 하루 종일, 내 글은 30분
- 03 Dec, 2025
기획서 양식 검색은 하루 종일, 내 글은 30분
오전 10시, 구글 검색부터
출근했다. 사수가 말했다. “이번 기능 PRD 작성해봐.”
PRD가 뭐지.
일단 검색했다. “PRD 양식”, “PRD 템플릿 다운로드”, “PRD 예시”. 나오는 건 다 다르다. 어떤 건 10페이지, 어떤 건 2페이지. 뭐가 맞는 건지 모르겠다.
노션 템플릿 사이트 10개 탭을 열었다. 다 다르다. Product Requirements Document, Project Request Document, Business Requirements Document. 이게 다 같은 건가, 다른 건가.
30분 지났다. 아직 한 글자도 안 썼다.

선배 기획서 열어보기
회사 노션 들어갔다. 선배들이 쓴 기획서를 찾았다. 7개 열었다. 구조가 다 다르다.
A 선배: 배경 - 목적 - 요구사항 - 화면정의서 B 선배: 개요 - 문제정의 - 해결방안 - 일정 C 선배: 그냥 화면정의서만
뭐가 정답이지.
A 선배 기획서를 복사했다. 제목만 바꿨다. “배경”이라는 챕터에 커서를 놨다. 뭘 써야 하나. 배경이 뭐지. 왜 만드는 건지? 데이터는 어디서 가져와?
다시 구글 검색. “기획서 배경 예시”, “기획서 배경 작성법”.
1시간 지났다. 배경 챕터는 아직 비어있다.

BRD는 또 뭔데
사수한테 슬랙이 왔다. “BRD도 같이 써야 할 것 같은데”
BRD. 처음 듣는다.
검색했다. Business Requirements Document. PRD랑 뭐가 다른 건데. 어떤 블로그는 “BRD를 먼저 쓰고 PRD를 쓴다”고 한다. 어떤 블로그는 “요즘은 BRD 안 쓴다”고 한다.
유튜브를 켰다. “BRD 작성법”. 23분짜리 영상이다. 배속으로 봤다. 이해는 안 된다. 다시 봤다. 여전히 모르겠다.
회사 노션에 “BRD”로 검색했다. 문서가 3개 나온다. 열어봤다. 2개는 2년 전 거다. 1개는 읽어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오후 2시다. 점심을 먹었나 기억이 안 난다. 기획서는 여전히 백지다.
화면정의서 양식 지옥
“일단 화면정의서부터 그려볼까.”
피그마를 켰다. 와이어프레임을 그려야 한다. 어떻게 그리지. 선배 파일을 열었다. 컴포넌트가 잔뜩 있다. 이걸 어떻게 쓰는 거지.
다시 검색. “화면정의서 예시”, “화면정의서 양식 다운로드”. PPT 양식이 나온다. 다운받았다. 열어봤다. 너무 정갈하다. 나는 이렇게 못 그린다.
노션으로 그릴까, 피그마로 그릴까, PPT로 그릴까. 회사는 노션 쓰는데, 선배는 피그마 쓰던데, 구글에는 PPT가 많은데.
30분 동안 툴을 고민했다. 결정 못 했다.

오후 4시, 사수의 메시지
“진행 상황 어때?”
심장이 멎었다.
”…지금 구조 잡는 중이에요.”
거짓말이다. 구조는 없다. 탭 20개만 열려있다. 노션 페이지는 제목만 있다.
“5시까지 1차 드래프트 공유해줘.”
1시간 남았다.
30분의 폭발
더는 미룰 수 없다. 양식은 됐다. 일단 쓴다.
A 선배 기획서 구조를 복사했다. 챕터 제목만 남기고 내용을 지웠다.
배경: 우리 서비스에 XX 기능이 없어서 불편하다고 VOC가 왔다. 목적: XX 기능을 만들어서 사용자 불편을 해소한다. 요구사항: 1) 버튼을 누르면 2) 팝업이 뜬다 3) 확인을 누르면 저장된다.
이게 맞나 모르겠다. 일단 썼다.
화면정의서는 손으로 그렸다. 아이패드에 네모 몇 개 그리고 캡처했다. 노션에 붙였다.
25분 걸렸다.
사수의 피드백
5시 1분에 공유했다.
5시 3분에 답장 왔다. “오케이, 이 정도면 베이스는 됐어. 내일 같이 보완하자.”
…됐다고?
하루 종일 양식 검색하고, 30분 만에 쓴 게, 됐다고?
깨달은 것
양식은 중요하지 않았다.
PRD든 BRD든, 10페이지든 2페이지든, 피그마든 노션이든.
사수가 원한 건 ‘완벽한 양식’이 아니었다. “지금 뭘 만들려는지, 왜 만드는지, 어떻게 동작하는지”만 알면 됐다.
나는 하루 종일 양식을 고민했다. 정작 “뭘 만들지”는 30분 만에 정리했다.
순서가 반대였다.
그다음 날
출근했다. 사수가 내 기획서를 열었다.
“배경 부분에 데이터 좀 넣어줘. VOC 몇 건 왔는지.” “요구사항에 예외 케이스 추가해줘. 인터넷 끊기면 어떻게 되는지.” “화면 2번이랑 3번 사이에 로딩 화면 필요할 것 같아.”
30분 동안 수정했다. 살이 붙었다.
이게 기획이었다.
양식 찾는 게 아니라, 생각을 정리하는 거. 예쁘게 쓰는 게 아니라, 빠진 거 채우는 거.
지금도 양식은 검색한다
여전히 새로운 문서 쓸 때는 검색한다. “XX 문서 양식”, “XX 템플릿”.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양식을 찾으면, 10분 본다. 구조만 파악한다. 그리고 닫는다.
내 노션을 열고, 챕터만 따라 만든다. 그리고 쓴다. 일단 쓴다.
첫 문장이 이상해도 쓴다. 두 번째 문장이 연결 안 돼도 쓴다.
1시간 쓰고 나면, 뭐가 이상한지 보인다. 그때 고친다.
양식은 출발점이다. 도착점이 아니다.
주니어 기획자의 함정
주니어일수록 양식에 집착한다. 나도 그랬다.
“양식만 잘 따라 하면, 좋은 기획서가 나올 거야.”
틀렸다.
좋은 양식에 빈 내용을 채우면, 그냥 빈 문서다. 나쁜 양식에 꽉 찬 내용을 채우면, 그게 기획서다.
사수는 양식을 안 본다. 내용을 본다. 개발자는 양식을 안 본다. 요구사항을 본다.
“PRD 양식이 뭐예요?”라고 물으면, “네가 편한 대로 써. 내용만 빠뜨리지 마.”라고 답한다.
30분의 기획, 2시간의 다듬기
요즘 내 방식이다.
- 양식 검색 10분 (구조만 봄)
- 생각 정리 30분 (뭘 만들지, 왜 만들지, 어떻게 동작하는지)
- 초안 작성 30분 (일단 다 씀, 이상해도 씀)
- 빠진 거 채우기 1시간 (데이터, 예외 케이스, 일정)
- 다듬기 30분 (문장 정리, 순서 조정)
총 2시간 반.
예전엔 양식 찾는 데 4시간 쓰고, 쓰는 데 30분 썼다. 지금은 쓰는 데 2시간 쓰고, 양식은 10분 본다.
생산성이 4배 올랐다.
완벽한 양식은 없다
회사마다 다르다. 팀마다 다르다. 사수마다 다르다.
A 팀은 BRD 먼저 쓴다. B 팀은 PRD만 쓴다. C 팀은 화면정의서만 있으면 된다.
“정답 양식”을 찾으려고 하루를 쓰지 마라.
우리 팀 선배 기획서 3개만 열어봐라. 공통점을 찾아라. 그게 우리 팀 양식이다.
양식보다 중요한 것
질문에 답하는 거다.
- 왜 만드나? (배경, 목적)
- 뭘 만드나? (요구사항, 기능)
- 어떻게 동작하나? (화면정의서, 플로우)
- 언제 만드나? (일정)
- 누가 만드나? (담당자)
이 5개만 답하면, 그게 기획서다.
챕터 제목이 “배경”이든 “Background”든, “문제 정의”든 상관없다.
“왜 만드는지” 설명되면 된다.
1년 차의 나에게
양식 검색 그만해.
하루 종일 템플릿 보지 마.
그 시간에 생각해.
“이 기능이 왜 필요한가?” “사용자가 어떻게 쓸까?” “개발자가 뭘 알아야 할까?”
그리고 써. 일단 써.
못나도 써. 이상해도 써.
양식은 나중에 맞춰도 된다. 내용은 지금 채워야 한다.
양식은 껍데기고, 생각이 내용이다. 껍데기 고르는 데 하루 쓰지 말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