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가 '이건 안 돼요'라고 했을 때 대안이 입에서 안 나오는 이유
- 03 Dec, 2025
그 자리에선 입이 안 떨어진다
오늘도 개발자한테 말렸다.
“이거요, 안 될 것 같은데요.”

회의실. 오후 3시. 개발자 2명, 디자이너 1명, 사수, 나.
화면 정의서 공유했다. 2주 걸렸다. 사수한테 3번 피드백 받았다. 이번엔 괜찮을 줄 알았다.
백엔드 개발자가 말했다.
“이 필터 기능, 실시간으로는 힘들어요. DB 구조상.”
머리가 하얘졌다.
입이 안 떨어졌다. 눈만 깜빡거렸다.
“아… 네… 그럼…”
그게 다였다.
사수가 끼어들었다. “그럼 캐싱으로 처리하면 어때? 5분 단위로.” 개발자가 고개 끄덕였다. “그건 되죠.”
회의 끝났다. 나는 회의록만 썼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생각난 것들
집 가는 2호선 안.
갑자기 생각났다.
“아, 배치 처리로 하면 되잖아. 하루 1번 업데이트.”
“아니면 필터 개수 줄이면? 꼭 7개 다 필요한가?”
“실시간 말고 ‘최근 업데이트 시간’ 표시하면?”

왜 회의 때는 안 떠올랐지.
노트북 꺼냈다. 지하철에서 노션 켰다.
‘필터 기능 대안’이라고 제목 쓰고 3가지 적었다. 1. 배치 처리, 2. 필터 개수 축소, 3. 업데이트 시간 표시.
회의 중엔 한 개도 안 떠올랐는데.
30분 지나니까 3개가 나왔다.
집 도착할 때쯤엔 5개가 됐다.
왜 그 자리에선 안 될까
이게 처음이 아니다.
지난달에도 그랬다. 로그인 플로우 회의.
개발자: “소셜 로그인 3개 동시 연동은 복잡해요.”
나: “아… 네…”
사수: “그럼 1개만 먼저 붙이고 나머지는 2차?”
개발자: “그게 낫죠.”

또 그달 전에도. 알림 기능.
개발자: “푸시 서버 구축 시간 걸려요.”
나: ”…”
사수: “웹훅으로 먼저 테스트?”
왜 항상 사수가 말하지.
왜 나는 입만 벙긋거리지.
퇴근하면 대안이 쏟아지는데 회의 중엔 바보가 된다.
패턴이 보였다
3개월간 회의록 다시 봤다.
공통점이 있었다.
- 개발자가 “안 돼요” 하면 멈춘다
- 5초 이상 침묵
- 사수가 끼어든다
- 나는 회의록 쓴다
- 퇴근 후 대안 떠올린다
왜 이러지.
비전공이라 그런가? CS 지식 부족해서?
아니다. 사수도 비전공이다. 사수는 바로 대안 말한다.
실력 차이? 그것도 맞는데 전부는 아닌 것 같다.
사수한테 물어봤다.
“저 왜 회의 때 아무 말도 못 하는 것 같아요?”
사수가 웃었다.
“긴장해서 그래. 틀릴까 봐.”
틀릴까 봐 입을 닫는다
맞는 말이었다.
개발자가 “안 돼요” 하면 머릿속에서 이런 생각이 돈다.
‘내가 잘못 기획한 건가?’
‘개발을 모르는 거 들킬까?’
‘이상한 대안 말하면 어쩌지?’
‘다들 나 쳐다볼 텐데.’
그래서 입을 닫는다.
안전하게.
회의록이나 쓰자.
문제는 이게 반복된다는 거다.
회의 10번 중 8번은 이런다.
그리고 퇴근길에 후회한다.
‘아 그때 이렇게 말할 걸.’
‘저 대안 괜찮았는데.’
근데 다음 회의 때도 똑같다.
혼자 있을 때는 괜찮다
신기한 건 혼자 기획서 쓸 땐 괜찮다는 거다.
노션 켜고 화면 정의서 쓸 때. 유저 플로우 그릴 때.
“이건 어렵겠네? 그럼 이렇게 바꾸면 되겠다.”
“개발 기간 줄이려면 이 기능 빼면 되지.”
대안이 술술 나온다.
사수 피드백 받을 때도 괜찮다.
“여기 이러면 개발 어려워.”
“아 그럼 이렇게 하면요?”
1:1이면 말이 나온다.
근데 회의실에 사람 5명 모이면 입이 얼어붙는다.
특히 개발자 2명 이상 있으면 더 심하다.
시간이 필요한 거였다
깨달은 게 있다.
나는 즉석에서 생각 정리가 안 된다.
개발자가 “안 돼요” 하면 머릿속이 하얘진다.
그 상태에서 대안 떠올리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5분? 10분? 30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30분 정도.
회의는 그 시간을 안 준다.
“안 돼요.”
(5초 침묵)
“그럼 이렇게 하죠.”
사수는 5초면 충분하다. 나는 30분 필요하다.
그래서 회의 중엔 말을 못 한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30분 지나면 대안이 나온다.
실험을 해봤다
지난주 회의.
푸시 알림 우선순위 정하는 자리였다.
개발자가 말했다. “전부 다 하면 2주 걸려요.”
또 머리가 하얘졌다.
근데 이번엔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5분만 시간 주세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노션 켰다. 알림 목록 다시 봤다.
‘꼭 필요한 거’, ‘나중에 해도 되는 거’ 분류했다.
3분 걸렸다.
“회원가입 완료 알림이랑 결제 알림만 1차로 하면 어때요? 나머지는 2차에.”
개발자가 고개 끄덕였다.
“그럼 1주 정도요.”
됐다.
처음으로 내 입으로 대안을 말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 대안이 최선이었을까?
모르겠다.
사수는 나중에 “좋은 판단이었어”라고 했다.
근데 회의 직후엔 확신 없었다.
‘이게 맞나?’
‘더 좋은 방법 있었나?’
집 가면서도 계속 생각했다.
근데 깨달았다.
회의 중 대안이 완벽할 필요는 없다.
일단 방향을 제시하면 된다.
“이건 어때요?”
그럼 개발자가 말한다. “그건 이래서 어렵고, 이렇게 바꾸면 돼요.”
그게 협업이다.
내가 정답을 들고 가는 게 아니다.
방향을 던지면 같이 다듬는 거다.
지금도 떨린다
어제 회의.
또 개발자가 말했다. “이 API 연동 복잡해요.”
심장 빨라졌다. 손에 땀 났다.
근데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노션 켰다. 화면 정의서 다시 봤다.
“이 부분 꼭 필요한가요? 이거 빼면 어때요?”
개발자가 생각했다. 10초.
“그럼 되긴 해요. 유저 입장에선 별 차이 없을 것 같은데.”
됐다.
완벽한 대안은 아니었다. 근데 방향은 제시했다.
지금도 떨린다. 틀릴까 봐. 이상하게 들릴까 봐.
근데 입을 연다. 30초든 5분이든 시간 달라고 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노트 본다. 뭐라도 던진다.
패턴이 바뀌고 있다
요즘 회의록 보면 다르다.
3개월 전:
- 개발자: “안 돼요”
- 나: ”…”
- 사수: “이렇게 하죠”
지금:
- 개발자: “안 돼요”
- 나: “잠깐만요. 이건 어때요?”
- 개발자: “그건 이래서 어렵고…”
- 나: “그럼 이건요?”
100% 바뀐 건 아니다. 아직도 입 닫을 때 많다.
근데 예전보단 낫다. 10번 중 3번은 말한다.
3번이 4번 되고, 5번 되겠지.
사수가 말했다.
“많이 늘었네. 예전엔 회의 때 고개만 끄덕였잖아.”
“네… 아직 멀었는데요.”
“아니야. 너 몰라서 못 하는 게 아니더라. 긴장해서 그런 거였어.”
맞다.
나는 대안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말할 용기가 없었던 거다.
배운 것들
- 즉석 대답 못 해도 괜찮다
“잠깐만요. 생각해볼게요.”
이 말 하는 데 3개월 걸렸다.
회의 중 침묵이 무섭다. 다들 날 쳐다본다. 기다린다.
근데 5분 달라고 하면 준다. 아무도 뭐라 안 한다.
- 완벽한 대안 아니어도 된다
“이건 어때요?”
틀릴 수 있다. 개발자가 “그건 안 돼요” 할 수 있다.
그럼 또 물으면 된다. “그럼 이건요?”
협업은 대화다. 정답 맞히기 아니다.
- 퇴근 후 떠오른 대안도 쓸모 있다
지하철에서 생각난 거 슬랙에 남긴다.
“아까 회의 건인데, 이런 방법도 있을 것 같아요.”
늦어도 괜찮다. 다음 회의 전에 말하면 된다.
- 긴장은 줄지 않는다
10번째 회의도 떨린다. 심장 뛴다.
근데 입은 연다. 떨면서 말한다.
긴장 없애는 게 아니라 긴장하면서 하는 거다.
오늘 회의
오전 10시 30분. 주간 기획 회의.
새 기능 검토하는 자리다.
개발자가 말할 것이다. “이거 어려운데요.”
떨릴 것이다. 머리 하얘질 것이다.
근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잠깐만요. 5분만 주세요.”
노션 켜고 생각 정리한다. 뭐라도 던진다.
틀릴 수 있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근데 침묵보단 낫다.
3개월 전 나는 회의 때 말이 없었다.
지금도 많이 없다.
근데 조금씩 늘고 있다.
1년 뒤엔 어떨까.
모르겠다. 근데 지금보단 나을 것이다.
회의 시작 10분 전이다. 노트북 켠다. 기획서 다시 본다.
개발자가 “안 돼요” 할 지점 미리 생각해본다.
대안 3개 적어둔다.
준비됐다. 아니, 준비 안 됐는데 들어간다.
회의실 문 연다.
떨려도 입 여는 게 실력이다.
